[끊는 사람들]⑧ 끊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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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는 사람들은 어떻게 끊고 있는 것일까.
불굴의 의지로 참는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참아서 끊을 수 있다면 애초에 마약이라는 말도, 중독이라는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약 때문에 삶이 바닥을 쳤다면 좀더 각별한 의지가 생기겠지만 약을 향한 열망 앞에서는 힘들었던 기억도 흐려지게 마련이다. “바닥 밑에 지하 있었다”고 말하는 중독 당사자들이 그렇게나 많은 이유다.
공동체가 답인 줄 알았다. 회복 공동체 내지는 재활 공동체라고 불리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 약물 중독을 끊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한 공동체를 오래 관찰하다 보니 모여 있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공동체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다. 한국에서 대다수 약물 중독 회복 공동체는 회복자 한 사람이 이끌어 가는 형태다. 시스템보다는 공동체 대표의 리더십, 입소자들 간 ‘케미’에 의존한다.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으레 벌어지곤 하는 갈등이 공동체에서도 발생한다. 공동체에서 만나 사이좋게 재발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생긴다. 모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저 모이기만 해서는 해결되는 게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던 중 익명의 약물중독자(Narcotics Anonymous·NA) 모임을 알게 됐다. NA는 195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이후 해외로 확산해 전 세계적 모임이 됐다. 한국 NA는 2004년 시작됐다. 인종, 국가, 문화, 언어가 달라도 NA에 속했다면 모두 같은 공동체다. 전 세계 NA는 같은 강령을 공유한다. 그러면서도 익명으로, 자발적으로 모이기 때문에 마치 세계적 비밀 결사체 같은 인상도 준다. 본질은 NA 모임 참여자들이 서로 돕고 도움받는 상호 부조 네트워크다.
NA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운영을 강조한다. NA 모임은 특정 자본이나 권력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재정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공동의 복리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조직화를 거부하고, 익명으로만 모인다는 원칙은 금전욕, 권력욕, 명예욕이 자리잡을 공간을 없앤다. 회복이 최우선 목표이기에, 이를 훼방할 수 있는 요소들을 모두 배척한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담은 12가지 원칙이 ‘NA의 12 전통’이다.
개인에게 적용되는 12가지 원칙도 있다. ‘NA 12단계’다. 12단계는 마치 종교의 계명 같기도 하다. 중독 당사자들은 12단계를 ‘한다’고 표현한다. “저는 요즘 12단계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식이다. 1단계에서 포기하는 사람도, 12단계까지 해내는 사람도 있다. 먼저 12단계를 마친 사람이 후원자가 되어 다른 이의 12단계 완수를 돕는다.
NA 모임은 보통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열린다. 모임이 시작되면 익명의 참가자들이 NA의 12 전통과 12단계를 읊는다. 이후 각 단계에 비추어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털어놓고, 서로 북돋우고 지지한다. 서울의 한 NA 모임에 참관했을 때 듣고 기록한 한 참가자의 말이다.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모두 똑같은 딜레마를 마주쳤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남았는가? 선택은 둘 중 하나였습니다. 교도소, 정신병원, 죽음이라는 쓰디쓴 결말 또는 계속 살아갈 용기를 찾는 길입니다. 과거에는 극히 소수의 약물 중독자들만이 두 번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중독자들은 행운아일지 모릅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NA라는 단순한 방법이 많은 중독자들의 삶 속에서 효과를 증명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가능한 것입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사람이 되면 된다는 어떤 선배 기자의 말에 맥이 빠진 적이 있다. NA 12단계는 ‘회복하려면 좋은 사람이 되면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약물을 놓지 못하던 과거의 자신을 통렬히 떠나보내라는 권면이다. 언뜻 종교적이기도 하다. 중독자가 12단계를 하는 과정은 구도와도 닮았다. 12단계를 하는 중독 당사자들은 각 단계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그 내용을 적어 후원자에게 보인다. 후원자는 그가 앞서 적은 12단계 노트를 피후원자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서로의 삶을 나누며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간다.
1단계부터 난관이다. ‘우리는 중독에 무력했으며, 우리의 삶을 스스로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아무리 애써도 자신의 의지로는 중독을 절대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다른 존재에 의지해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2단계와 3단계는 초월자의 존재를 제시한다. 약물을 끊고 건강한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건 초월자가 이끌어줘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각자 상상하는 형태의 신을 마음 속에 두게 된다. 특정 종교여야 할 필요는 없다. 자기통제력이 완전히 무용하다는 것을 절감하기 전까지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라, 회복 초심자들은 대부분 1단계부터 진입하지 못한다.
첫 약물 사용 후 11년이 지난 썬(⑤편 및 ⑥편 참조)도 올해 들어 1단계를 받아들였다. 마지막 재발 직후다. 그의 이전 삶은 다짐하고 무너지는 일의 반복이었다. 의지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다만 “나는 다를 거라는 생각, 내가 생각한 방법대로 하면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번번이 넘어지게 했다고 썬은 말했다. 사회적 성취가 컸던 사람일수록 1단계를 장벽으로 느낄 수 있다.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자아가 자신이 무력한 존재라고 선언하는 것을 방해한다. 예중, 예고,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을 나온 썬도 엘리트 예술인이라는 정체성이 1단계 인정을 가로막았다. 썬은 현재 최장 기간 단약을 이어 가고 있다.
썬은 4단계에 와 있다. ‘우리는 면밀하고 두려움 없이, 우리 자신에 대한 도덕적 검토를 끝냈다.’ 썬은 이미 자신의 온갖 이야기를 충분히 들려줬으면서도, 그가 4단계에서 어떤 것들을 적어내려갔는지 상상도 못 할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절대 말해줄 수 없다고 펄쩍 뛰기도 했다. “4단계가 오래 걸리더라고요. 쉽지가 않아요. 내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망가져 있었는지 다 고백해야 하거든요.” 썬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면 그가 어떤 것들을 털어놨는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5단계는 도덕적 흠결을 초월자, 자신, 그리고 주위 사람에게 시인하라고 권한다.
“4~5단계에서 70%쯤 낙오된다고 해요. 8~9단계도 쉽지 않고요. 4·5·8·9단계가 중요해요.” 썬의 12단계 후원자가 말했다. 그동안 자신이 아프게 한 주위 사람들을 찾아가 낱낱이 참회하고, 직접 보상하는 과정이 8~9단계다. 누구든 자기 치부를 인정하고 직시하는 게 가장 아프고 힘들다. 약물 중독은 사람을 한층 깊은 도덕적 수렁으로 끌어내리기 때문에 더 어렵다.
썬의 후원자도 그랬다. 50대 중반인 그는 10대 때 약물을 시작해 40대까지 교도소 입·출소를 반복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회심했다. “4단계 중인 어느 날이었는데, 너무 적기가 싫은 거예요. 도저히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들이 있잖아요. 잘 끊고 있는데 이런 것까지 왜 적어야 하나 했죠. 그런데 그때 마침 후원자께서 카톡으로 파일을 하나 보내더라고요. 자기의 4단계를 적은 파일이었어요. 너무 충격적인 내용들이 많았거든요. 저도 못지않은 삶을 살았지만 ‘이걸 다른 사람한테 말한다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후원자에게 경외심이 들었죠. 덕분에 적기 시작했어요. 썬이 4단계를 힘들어하길래, 저도 얼마 전에 제 4단계를 전해줬습니다.”
그는 아내의 친구와 외도를 한 과거를 이야기해줬다. 4단계의 일부다. 12단계를 알기 전에는 ‘약 안 하는 사람들은 맨정신에도 외도하고 죄 짓지 않느냐’고 생각하며 잘못을 회피하고 합리화했다고 했다. 8단계와 9단계에 이르렀더니 ‘뚜껑이 날아갈 정도로’ 좋았다고 했다. “약을 했을 때 너무 좋으면 뚜껑이 날아간다는 표현을 하는데, 그것보다 더 좋아요. 용서하고, 용서받고,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는 시간이었어요. 8~9단계는 내가 잘못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잘못을 고백하고 보상하는 과정이잖아요. 빚을 갚거나, 직접 죄를 읊으며 뉘우치거나 하죠. 그런데 대부분이 괜찮다고, 용서했다고 해줘요. 그럴 때 알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삶이 다시 보이게 돼요.”
서울의 한 NA 모임을 참관한 날이었다. 고백들이 쏟아졌다. 그냥 들어 넘기기 힘든 고백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중독자가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달리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저는 돈 벌려고 병원에 입원 중인 사람한테도 약을 팔았던 사람입니다. 그때는 약에 취해서 양심의 가책을 못 느꼈어요. 두고두고 뉘우치고 있습니다.”
“약은 안 했는데 오늘 모임 오기 전까지 일주일 내내 폭음했습니다. 아침 5시까지 마시다가 3시간 눈 붙이고 50㎞ 이상 운전했는데 아마 100% 음주운전이었을 거예요.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나더라고요. 가족한테는 대리운전 불렀다고 거짓말했어요. 참회합니다.”
“병원에 입원한 지 2주 만에 처음 외출했는데 나오자마자 바로 재발했어요. 하고 나니까 아무 힘이 없고, 대체 언제 회복할 수 있는 건지 절망스럽고, 모임도 나오기 싫었어요. 그래도 막상 오니까 마음이 편안하고 좋아요.”
“퀵서비스 일을 하는데, 얼마 전에 비가 와서 돈을 좀 만지게 됐어요. 딱 1g 살 돈이더라고요. 머릿속에 한 번 꽂히니까 아무 생각도 안 들어왔어요. 일 마치고 약 사려고 막 검색을 하는데 마침 아는 형님이 전화를 준 거예요. 지금 상태가 안 좋다고 했더니 일단 자기 집에 오라고 하더라고요. 짐 챙기면서 배고파서 밥도 먹고 하니까 다행히 갈망이 내려갔어요. 일당은 다 아내한테 줘버렸고요. 그런데 또 형님 집에 가는 동안 약을 할 기회를 놓쳐서 아쉽다는 생각이 가득한 거예요. 며칠 뒤에 또 비가 온다고 하는데 상태가 아슬아슬해서 걱정입니다. 여기서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썬의 후원자는 12단계를 통해 “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노력하며 자기 자신을 매일 검토하고 돌아보고 발버둥치는구나 알게 된다”고 했다. 지난 3년간 회복에 진심인 중독 당사자들을 만나 오면서 같은 걸 느꼈다. 이들은 자기 삶에 정말로 열심이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자기 삶을 점검하고, 행동을 삼가고,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흡사 수도자처럼 살았다. 그들의 삶을 통해 오히려 내 생활을 돌아봤다. 이 정도로 처절하게 성찰하며 산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비로소 알았다. 기자라는 이유로 그동안 값없이 들었지만, 중독 당사자들이 깊고 내밀한 이야기까지 기꺼이 해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자성 덕분이라는 걸.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다가도 약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미혹되면, 그리고 운 나쁘게 걸리면 또 다시 감방 신세다. 잡아 가두는 것은 중독자를 회복시키지 못한다. 끊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살려내고 있는 건 NA 모임과 12단계 실천이었다.
(⑨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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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지난 9월16일, 정부가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을 공식화했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이렇다 할 진전이나 변화 없이 이어진 공백이 7년 만에 깨진 것이다. 통칭 ‘미프진’으로 불리는 경구용 임신 중지 약물(이하 ‘미프진’)은 2026년 기준 전 세계 101개국에서 합법이며, 세계보건기구(WHO)도 임신중지 약물 사용을 통해 사망 사고나 질병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행정적 무관심과 문화적 반발에 부딪혀 도입이 지지부진했다. 그동안 온라인에서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미프진을 구매한 이들은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되었다. <우리들의 블루스>(2022)에는 고등학생 커플이 온라인에서 미프진을 구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기간도 지난 데다 가짜일 확률이 높아 이들은 결국 약을 쓰지 못한다. 독립영화 <지우러 가는 길>(2025)에서 담임교사 종성과 비밀 연애를 하던 고등학생 윤지는 임신한 뒤 종성이 사라지자, 임신중단을 결심한다. 불법인 미프진을 사려고 룸메이트 경선의 돈을 훔치고, 낙태 수술을 받으려고 동물병원까지 가는 윤지의 위태로운 여정을 경선이 쫓는다. 위민온웹(Women on Web)은 WHO의 지침에 따라 안전한 임신 중지 및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국제 비영리 단체로, 기부금을 내면 미프진을 우편으로 보내준다. 수천 명의 한국 여성이 위민온웹의 도움을 받았다. 이제 2027년 상반기부터 한국에서도 약물로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다.
미프진 도입은 2025년부터 성평등가족부가 차근차근 추진해 왔으며, 7월 대통령의 적극적인 권고로 급물살을 탔다. 수술보다 덜 위험하고 덜 부담스러운 형태로 여성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혁명적이다. 그런데 정부의 미프진 정식 도입 발표 직후 종교계에서 “임신중지약은 살인”이라며 반발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달리 말하면 진부한 레토릭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걱정할 필요 없는 몸들은 언제나 이 문제를 ‘생명권 경시’의 차원, 즉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의 대립으로 끌고 간다. 더 나은 논의와 새로운 생명 존중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은 낙태죄의 역사부터 미프진 도입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훑어보고, 그 마디마디에 출몰하는 작품을 검토하며 그 경로를 탐색하고자 한다. 과거 자료를 참고하는 과정에서 편의상 낙태와 임신중단이라는 표현을 혼용한다.
국가가 임신중단을 처벌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일본 형법을 조선에 적용하여 시행된 ‘조선 형사령’이 시초다. 처벌 대상은 여성과 의사다. 조선시대까지는 상해로 인해 임신이 중단될 경우 상해를 입힌 가해자를 처벌했으나 임신을 중단한 여성을 처벌하는 법은 따로 없었다.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의료적 기술이 없기도 했고,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운명인 양 여겨지는 시대라 이 문제 자체가 유의미하게 포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여성은 존재했고 이를 막으려는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분투가 있었으나 국가가 임신중단을 처벌할 권리를 공식화한 것은 근대부터다. 해방 뒤 독자적인 법체계를 갖추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1953년 편찬된 형법에는 낙태죄 조항이 유지되었으며, 여전히 여성과 의료진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서는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간의 임신, 엄마의 건강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낙태를 할 수 있었다. 이 법안 또한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따른 것으로, ‘국가가 건강하고 정상적인 국민을 보유할 권리’와 피치 못할 피해를 구제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대대적인 산아제한 정책이 펼쳐진 1960년대 중반부터는 낙태는 묵인되었을 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은밀하게 권장했다. 정부는 임신 초기 낙태를 무료로 해주는 ‘월경조절술 사업’에 비용을 지원하고, 농촌을 중심으로 영구피임 시술과 낙태 수술을 진행한 ‘낙태 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수신지 작가의 만화 <곤Gone>(2019)에는 과거 한 번이라도 낙태 경험이 있었다면 여성을 처벌하는 가상의 세계관이 등장한다. 법이 제정되었을 때부터의 ‘범법자’를 공소시효 없이 처벌하겠다는 정책 아래 중노년 여성들까지 줄줄이 적발된다. 수십 년이 지나서 갑자기 감옥에 가게 된 중노년 여성들은 “나중에 문제가 될까 봐 보건소에서 했는데”, “옛날에는 그게 흔한 일이었어. 흉도 아니었다니까”라며 당황한다. 실제로 낙태는 ‘몸을 함부로 굴린 젊은 여자’의 만행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2000년대 초반까지 기혼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를 수가 없다. 피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피임에 대한 인식도 열악하던 시절에 어떻게 일곱, 여덟씩 낳던 아이들을 갑자기 단기간에 ‘최대 두 명’ 정도로만 낳았겠는가. 더군다나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은 그대로인데, 적게 낳으라고 종용하니 결국 성별 감별 낙태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1980년대 후반, 적당히 인구 조절이 이루어지자 낙태를 대하는 태도가 다시 변화한다. 1987년부터 정부는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을 금지하며 법률을 강화했다. 1994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은 지금까지 회자하는 납량 특집인데, 낙태된 태아의 영혼이 주인공의 몸에 빙의해서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공포에 질려 봤던 기억이 생생하며, 낙태는 나쁜 것이라는 문화적 감각을 많은 이들의 의식에 새긴 작품이다. 이 무렵부터 도시 괴담에는 소위 말하는 ‘태아령’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초음파 기술 발달로 뱃속의 아이 형상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뱃속의 아이가 수술 도구를 피해 도망 다니는 자극적이고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영상이 떠도는 인터넷 환경도 막연한 거부감과 임신중단 경험이 있는 여성을 향한 적의에 기여했다.
에리카 밀러는 임신중지 서사에 특정한 ‘감정 각본’이 있다고 지적한다. 감정 각본은 한 사회의 ‘상식적인 감정’을 규정하는 일관된 내러티브로, 어떤 일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기대로 형성된다. 지배적인 임신중지 감정 각본에는 슬픔‧죄책감‧수치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중심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반反 임신중지 정서를 심는다. 미디어에서 임신중단을 한 후 고통과 수치심을 느끼거나, 심장소리를 듣고 죄책감을 느낀 후 생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특정한 감정 각본의 반영이다. 임신중단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비정하고 잔인한 여자로 몰아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에리카 밀러에 따르면 어떤 임신중지에는 안도‧감사‧희망 등의 긍정적 감정이 따르기도 한다.(박다솜, ‘임신중지 서사의 감정각본 다각화-2019년 낙태헌법불합치 판결 이후의 한국소설을 중심으로’, <한국여성문학회>, 2024, 83-86쪽)
수신지 작가의 <곤>에서 스무살의 나샛별은 임신중절을 하러 갔다가, 수술 직전에 아이가 이미 자연 유산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경우에는 감옥에 가지 않고 수술비도 대부분 돌려받는다는 말에 샛별은 몹시 안도하며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신의 삶을 살러 간다. 2024년 개봉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 중 한 편인 ‘재희’가 원작이다. 극 중 재희는 임신중단을 하러 병원에 갔다가 여성의 순결을 운운하는 의사에게 반발하여 자궁 모형을 훔쳐 달아나고, 무사히 수술이 끝난 것에 안도한다. 재희는 그 뒤로도 자유롭게 살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한다. 영화 <자, 이제 댄스타임>(2014)은 임신중단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오랜 금기를 깨고 카메라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다큐멘터리다. 한 출연자는 말한다. “그때의 나를 사랑해주고 싶어서, 이 인터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임신중단을 한 여자도 그 순간과 그 이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임신중단을 둘러싼 윤리적 기준과 문화적 감수성을 재편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감정 각본과 서사가 필요하다.
지금 임신중단을 둘러싼 논의를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의 대립에 가두는 것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하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는 무엇이 ‘원치 않는 임신’을 만드느냐, 국가가 개인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처벌할 수 있느냐로 향해야 한다. 성폭력, 빈약한 성교육과 피임 실천률,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멸시하는 문화에서 임신중단을 죄악시하는 방법으로는 생명을 ‘중시’할 수 없다. 여성의 생명을 경시하는 쾌감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차라리 솔직할 것이다.
경남 창원 방위·원자력 융합 국가산업단지(창원 제2국가산단) 조성 사업이 연이은 대형 악재로 표류하고 있다. 정치권 개입 의혹에 이어 총 4820억원 규모의 추가 사업비 분담을 놓고 시행기관 간 공방이 이어지면서 또 암초를 만났다.
지난 21일 창원 의창구 북면 고암마을 일대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산단 지정을 촉구하던 1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구리 광산이 폐광됐음을 알리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고 농작물을 살피러 온 농부들만 간혹 눈에 띄었다.
의창구 북면·동읍 일대에 1조5700억원을 투입하는 창원 제2국가산단 후보지는 1973년부터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데 이어 2023년 3월부터 2029년 3월까지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였다.
주민들은 농막 설치와 지하수 개발 등 각종 행위 제한에 따른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김모씨(80)는 “4년째 땅을 팔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산단 지정 여부를 빨리 결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최모씨(64)는 “지난여름 가뭄 때 농업용수도 제때 공급받지 못해 땅콩 수확량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2033년 준공 목표인 창원 제2국가산단의 규모는 애초 339만㎡에서 238만㎡로 축소됐다. 사업 시행자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70%), 창원시 (15%), 경남개발공사(15%)다.
창원 제2국가산단 계획은 윤석열 정부 때인 2023년 3월 후보지 선정 이후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2024년 말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 부지 선정 개입 의혹과 주변인들의 사전 정보 취득을 통한 땅 투기 의혹이 불거진 데다, 지난해 2월에는 사업 예정지에서 일제강점기 폐광산이 발견되면서 국토교통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심의가 보류됐다.
경남도와 창원시는 폐광산 영향권 125만㎡를 제외하는 조치로 면적을 줄인 뒤 같은 해 9월 국토부에 재심의 신청서를 제출했다. 국토부 재심의가 통과되면 재정경제부 예비타당성조사와 산업단지계획 신청 등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러나 국토부 재심의는 지연되고 있다. 현재 안건 상정조차 보류된 상태다.
공동 사업시행자인 LH와 창원시 간 의견 차이도 변수로 떠올랐다. 핵심 쟁점은 기존 산단 조성 비용 외에 추가로 들 것으로 예상되는 4820억원 부담 주체다.
창원시는 지난해 7~9월 폐광산 경계 등 주변 17곳을 조사한 결과, 일부 기반암에서 오염이 확인됐을 뿐 사업 추진에는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반면 LH는 올해 5~6월 추가 조사를 벌여 24개 지점 중 13개 지점에서 암석류 등 오염이 확인됐다며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LH는 토지 정화에 필요한 비용이 1000억원가량 소요될 수 있다며 지자체에 처리와 비용 부담 등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산단 분양가 인하를 위한 재원 보전 요구까지 더해졌다. LH는 인근 산단 수준의 공급가를 맞추기 위해 추정 조성 원가와 애초 목표 공급가격 간 차액인 3820억원을 창원시가 보전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전액 수용은 불가능하다고 창원시는 맞서고 있다.
LH 관계자는 “사업비 변수가 발생해 어떻게 진행될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창원시 관계자는 “합리적인 근거가 제시된다면 상호 협의하겠지만 무조건 수용은 어렵다”고 말했다. 경남도 관계자는 “시행자 간 협의를 통해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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