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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이진송의 아니 근데]‘생명권 대 자기결정권’ 프레임은 진부···여성에 다양한 서사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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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이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6-09-2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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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6일, 정부가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을 공식화했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이렇다 할 진전이나 변화 없이 이어진 공백이 7년 만에 깨진 것이다. 통칭 ‘미프진’으로 불리는 경구용 임신 중지 약물(이하 ‘미프진’)은 2026년 기준 전 세계 101개국에서 합법이며, 세계보건기구(WHO)도 임신중지 약물 사용을 통해 사망 사고나 질병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행정적 무관심과 문화적 반발에 부딪혀 도입이 지지부진했다. 그동안 온라인에서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미프진을 구매한 이들은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되었다. <우리들의 블루스>(2022)에는 고등학생 커플이 온라인에서 미프진을 구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기간도 지난 데다 가짜일 확률이 높아 이들은 결국 약을 쓰지 못한다. 독립영화 <지우러 가는 길>(2025)에서 담임교사 종성과 비밀 연애를 하던 고등학생 윤지는 임신한 뒤 종성이 사라지자, 임신중단을 결심한다. 불법인 미프진을 사려고 룸메이트 경선의 돈을 훔치고, 낙태 수술을 받으려고 동물병원까지 가는 윤지의 위태로운 여정을 경선이 쫓는다. 위민온웹(Women on Web)은 WHO의 지침에 따라 안전한 임신 중지 및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국제 비영리 단체로, 기부금을 내면 미프진을 우편으로 보내준다. 수천 명의 한국 여성이 위민온웹의 도움을 받았다. 이제 2027년 상반기부터 한국에서도 약물로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다.
미프진 도입은 2025년부터 성평등가족부가 차근차근 추진해 왔으며, 7월 대통령의 적극적인 권고로 급물살을 탔다. 수술보다 덜 위험하고 덜 부담스러운 형태로 여성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혁명적이다. 그런데 정부의 미프진 정식 도입 발표 직후 종교계에서 “임신중지약은 살인”이라며 반발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달리 말하면 진부한 레토릭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걱정할 필요 없는 몸들은 언제나 이 문제를 ‘생명권 경시’의 차원, 즉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의 대립으로 끌고 간다. 더 나은 논의와 새로운 생명 존중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은 낙태죄의 역사부터 미프진 도입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훑어보고, 그 마디마디에 출몰하는 작품을 검토하며 그 경로를 탐색하고자 한다. 과거 자료를 참고하는 과정에서 편의상 낙태와 임신중단이라는 표현을 혼용한다.
국가가 임신중단을 처벌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일본 형법을 조선에 적용하여 시행된 ‘조선 형사령’이 시초다. 처벌 대상은 여성과 의사다. 조선시대까지는 상해로 인해 임신이 중단될 경우 상해를 입힌 가해자를 처벌했으나 임신을 중단한 여성을 처벌하는 법은 따로 없었다.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의료적 기술이 없기도 했고,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운명인 양 여겨지는 시대라 이 문제 자체가 유의미하게 포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여성은 존재했고 이를 막으려는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분투가 있었으나 국가가 임신중단을 처벌할 권리를 공식화한 것은 근대부터다. 해방 뒤 독자적인 법체계를 갖추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1953년 편찬된 형법에는 낙태죄 조항이 유지되었으며, 여전히 여성과 의료진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서는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간의 임신, 엄마의 건강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낙태를 할 수 있었다. 이 법안 또한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따른 것으로, ‘국가가 건강하고 정상적인 국민을 보유할 권리’와 피치 못할 피해를 구제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대대적인 산아제한 정책이 펼쳐진 1960년대 중반부터는 낙태는 묵인되었을 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은밀하게 권장했다. 정부는 임신 초기 낙태를 무료로 해주는 ‘월경조절술 사업’에 비용을 지원하고, 농촌을 중심으로 영구피임 시술과 낙태 수술을 진행한 ‘낙태 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수신지 작가의 만화 <곤Gone>(2019)에는 과거 한 번이라도 낙태 경험이 있었다면 여성을 처벌하는 가상의 세계관이 등장한다. 법이 제정되었을 때부터의 ‘범법자’를 공소시효 없이 처벌하겠다는 정책 아래 중노년 여성들까지 줄줄이 적발된다. 수십 년이 지나서 갑자기 감옥에 가게 된 중노년 여성들은 “나중에 문제가 될까 봐 보건소에서 했는데”, “옛날에는 그게 흔한 일이었어. 흉도 아니었다니까”라며 당황한다. 실제로 낙태는 ‘몸을 함부로 굴린 젊은 여자’의 만행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2000년대 초반까지 기혼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를 수가 없다. 피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피임에 대한 인식도 열악하던 시절에 어떻게 일곱, 여덟씩 낳던 아이들을 갑자기 단기간에 ‘최대 두 명’ 정도로만 낳았겠는가. 더군다나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은 그대로인데, 적게 낳으라고 종용하니 결국 성별 감별 낙태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1980년대 후반, 적당히 인구 조절이 이루어지자 낙태를 대하는 태도가 다시 변화한다. 1987년부터 정부는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을 금지하며 법률을 강화했다. 1994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은 지금까지 회자하는 납량 특집인데, 낙태된 태아의 영혼이 주인공의 몸에 빙의해서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공포에 질려 봤던 기억이 생생하며, 낙태는 나쁜 것이라는 문화적 감각을 많은 이들의 의식에 새긴 작품이다. 이 무렵부터 도시 괴담에는 소위 말하는 ‘태아령’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초음파 기술 발달로 뱃속의 아이 형상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뱃속의 아이가 수술 도구를 피해 도망 다니는 자극적이고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영상이 떠도는 인터넷 환경도 막연한 거부감과 임신중단 경험이 있는 여성을 향한 적의에 기여했다.
에리카 밀러는 임신중지 서사에 특정한 ‘감정 각본’이 있다고 지적한다. 감정 각본은 한 사회의 ‘상식적인 감정’을 규정하는 일관된 내러티브로, 어떤 일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기대로 형성된다. 지배적인 임신중지 감정 각본에는 슬픔‧죄책감‧수치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중심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반反 임신중지 정서를 심는다. 미디어에서 임신중단을 한 후 고통과 수치심을 느끼거나, 심장소리를 듣고 죄책감을 느낀 후 생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특정한 감정 각본의 반영이다. 임신중단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비정하고 잔인한 여자로 몰아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에리카 밀러에 따르면 어떤 임신중지에는 안도‧감사‧희망 등의 긍정적 감정이 따르기도 한다.(박다솜, ‘임신중지 서사의 감정각본 다각화-2019년 낙태헌법불합치 판결 이후의 한국소설을 중심으로’, <한국여성문학회>, 2024, 83-86쪽)
수신지 작가의 <곤>에서 스무살의 나샛별은 임신중절을 하러 갔다가, 수술 직전에 아이가 이미 자연 유산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경우에는 감옥에 가지 않고 수술비도 대부분 돌려받는다는 말에 샛별은 몹시 안도하며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신의 삶을 살러 간다. 2024년 개봉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 중 한 편인 ‘재희’가 원작이다. 극 중 재희는 임신중단을 하러 병원에 갔다가 여성의 순결을 운운하는 의사에게 반발하여 자궁 모형을 훔쳐 달아나고, 무사히 수술이 끝난 것에 안도한다. 재희는 그 뒤로도 자유롭게 살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한다. 영화 <자, 이제 댄스타임>(2014)은 임신중단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오랜 금기를 깨고 카메라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다큐멘터리다. 한 출연자는 말한다. “그때의 나를 사랑해주고 싶어서, 이 인터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임신중단을 한 여자도 그 순간과 그 이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임신중단을 둘러싼 윤리적 기준과 문화적 감수성을 재편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감정 각본과 서사가 필요하다.
지금 임신중단을 둘러싼 논의를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의 대립에 가두는 것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하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는 무엇이 ‘원치 않는 임신’을 만드느냐, 국가가 개인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처벌할 수 있느냐로 향해야 한다. 성폭력, 빈약한 성교육과 피임 실천률,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멸시하는 문화에서 임신중단을 죄악시하는 방법으로는 생명을 ‘중시’할 수 없다. 여성의 생명을 경시하는 쾌감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차라리 솔직할 것이다.
한국 펜싱 남자 사브르 대표팀이 아시안게임에서 4회 대회 연속 최강자 자리를 지켰다.
오상욱, 박상원(이상 대전광역시청), 도경동(대구광역시청), 황희근(국군체육부대)으로 구성된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26일 일본 아이치현 도코나메의 아이치 스카이 엑스포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 사브르 단체전 결승에서 일본에 45-44로 역전승을 거뒀다.
경기 종료 직전까지 일본에 끌려가며 먹구름이 가득했다. 에이스 오상욱이 마지막 주자로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41-44로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내리 4득점한 뒤 포효했다. 앞서 막판 1분을 남기고 역전패하며 은메달에 그친 한국 펜싱 여자 플뢰레 대표팀을 대신해 일본에 설욕했다.
이번 대회 대한민국 선수단의 15번째 금메달이다. 한국은 아시안게임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2014년 인천,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2023년 열린 2022 항저우 대회에 이어 4회 연속 금메달을 가져왔다.
23일 개인전에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던 ‘에이스’ 오상욱은 단체전에서도 동료들과 우승을 합작하며 2회 연속 2관왕에 등극했다.
심의겸·김효원의 사사로운 갈등서 비롯됐다는 동인·서인의 양분문정왕후·윤원형의 ‘외척정치 폐단’ 청산 놓고 조정 격론 벌어져당쟁 배경엔 전대의 적폐 ‘청산 방법론’을 둘러싼 정치 노선 충돌
16세기, 선조 대 초반 온 조정이 시끄러웠다. ‘이조전랑’이라는 자리에 임명될 인물을 놓고 벌어진 갈등 때문이었다. ‘이조전랑’은 이조의 정5품관인 정랑과 정6품인 좌랑을 통칭해서 부르던 명칭이다.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이들은 막강한 권한을 지녔다. 인사의 실무 전반을 담당하며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처럼 공론을 좌지우지하는 명예로운 관원의 후보 명단을 만들었기에 조정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갈등은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이 김효원의 이조전랑 임명을 반대한 데에서 시작했다. 김효원이 명종 대의 권신인 윤원형의 문객 노릇을 했다는 점을 흠으로 잡은 것이다. 그 뒤 어찌저찌 이조전랑이 된 김효원은, 이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전랑에 천거되자 반대한다. 외척이 이조의 관직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서였다. 심의겸·심충겸 형제는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들이니 외척 아니냐는 말이었다. 이러한 갈등을 두고 심의겸이 옳으니, 김효원이 옳으니 하며 조정의 의논이 분분히 갈렸다.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릉동(현 서울 중구 정동)에, 김효원의 집이 동쪽인 건천동(현 서울 중구 인현동)에 있다 하여 심의겸을 추종하는 이들을 서인, 김효원을 추종하는 이들을 동인이라 불렀다. 동인과 서인으로의 분당, 이렇게 조선 당쟁의 서막이 열렸다.
일제강점기 <한국정쟁지>, 즉 한국 정쟁의 역사를 쓴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는 동서 분당이라는 이 사건을 기술한 후 이렇게 정리한다. “즉, 동서 분당의 명목은 신파가 구파를 대체하려 할 때 발생한, 경쟁에 기초한 감정의 충돌로서, 구질구질한 인신공격으로부터 시작하여 말류의 파도를 젖힌 사적인 다툼인 뿐이었다.” 분당의 이유를 심의겸의 경쟁심에서 비롯했으며 거기에 김효원이 복수하며 발생한 사건이라고 함으로써, 당쟁의 시작을 감정적 이유에서 비롯한 사적인 갈등으로 일축한 것이다(김경래, ‘시데하라 다이라의 한국정쟁지와 조선시대 정치사’).
여기까지 이 이야기는 매우 익숙하다. 양반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 많은데 관직 자리는 부족한 상태, 관직 자리 하나를 놓고, 사사로운 감정이 충돌하여 벌어진 것이 당쟁이라는 이미지. 이야기가 너무 뭉뚱그려진 점이 없진 않지만, ‘팩트’에 어긋난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는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조정의 다른 관료들이 왜 굳이 심의겸, 혹은 김효원의 편을 들었는가 하는 지점이다.
그들은 왜 편을 들었을까
강의 때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묻곤 한다. “여기 길동이랑 꺽정이가 심의겸이랑 김효원처럼 싸우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여러분은 길동이 편, 혹은 꺽정이 편을 들며 바로 패싸움을 시작할 건가요?”
학생들 대부분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교실에서 뭔가 서로 감정이 삐끗하여 친구끼리 싸우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친구들의 싸움에 매번 온 반이 참전하여 편을 들어가며 서로 패싸움을 벌이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길 것이다. 그렇기에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 역시 사사로운 감정의 대립에서 비롯한 것에 불과했다면, 조정의 관료들이 참전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관여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길동이와 꺽정이가 누가 더 과자를 많이 먹을 것이냐를 두고 싸운다면 그러든지 말든지라고 하겠지만, 수학여행 때 숙식을 함께할 조 편성 기준을 놓고 대립하는 것이라면 나도 한마디 얹지 않겠는가?
심의겸과 김효원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심의겸은 명종 대 윤원형의 집에 김효원이 기숙하며 일했던 전력을 문제 삼았다. 윤원형이 누구인가. 문정왕후의 형제이자 명종의 외삼촌으로, 그 뒷배를 믿고 사화를 일으켜 뜻있는 선비들을 죽인 데다 온갖 부정행위로 재산을 증식해 국고보다 더한 부를 축적했다고 일컬어졌던 인물이다. 과거 급제도 안 한 젊은 선비가 이런 집에 빌붙어 있었다는 것은 윤원형의 권세에 힘입어 출세해보려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훗날 김효원은 과거에 급제한 후, 청렴하고 뜻이 높다는 평을 얻으며 주변에 따르는 이들이 늘었으나, 소싯적 모습을 본 적 있는 심의겸에게는 다 거짓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럼, 김효원은 왜 심충겸을 문제 삼은 것인가? 여기에서는 그가 심의겸·심충겸이 외척이라고 지적한 점을 되새겨봐야 한다. 후사가 없던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선조는 명종과 명종비 인순왕후의 양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선조의 양외삼촌이 된다. 잠깐이긴 해도 인순왕후가 선조의 수렴청정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심씨 집안은 문정왕후나 ‘윤원형화’할 것이라고 의심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 안 그래도 이 무렵 심의겸이 사헌부 대사헌을 맡자, 외척에게 너무 권세가 기울어진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터였다.
결국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갈등이 조정의 거대한 갈등으로 번져나간 것은 이조전랑 자리 같은 작고도 우발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과 근원은 그 이전, 명종 대에 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외척 정치로 인한 각종 적폐를 어떻게 청산해야 하는가라는 방법론의 차이가 조정을 갈라지게 만든 원인이었다.
적폐 청산의 격정이 불러온 것
문정왕후가 여전히 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시절, 윤원형은 거칠 것이 없었다. 1545년 을사사화부터 시작하여 정미사화(1547), 기유옥사(1549)까지, 그는 사화와 옥사를 거듭 일으키며 독점적 권력 행사에 방해가 될 만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숙청했다. 명종 초년의 이 사화들에서 희생된 이들은 중종 대 조광조와 그 일파를 숙청하여 큰 충격을 안긴 기묘사화 때보다 훨씬 많았다(이정철,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이렇게 사람을 많이 죽이고 펼친 정치도 지극히 파행적이었다. 윤원형은 정상적인 관료 체제는 무시하고 뇌물을 받으며 인사를 전횡했다. 그렇게 축적한 재산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남의 노비나 땅을 차지한 건 셀 수도 없을 정도인 데다, 한양 성안에 있는 집만 열여섯 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의 애첩 정난정도 유명했다. 정처인 김씨를 독살하고 정경부인 자리를 꿰찼다는 혐의를 받던 정난정은 한강의 두모포에서 쌀 두어 섬을 들여 지은 밥을 뿌려 물고기에게 보시하곤 했다(<연려실기술> 명종조 고사본말).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세상에, 물고기 배 채우는 짓을 거창하게 할 정도로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정난정은 자살했으며 그에 충격받은 윤원형도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말았다.
원흉은 사라졌지만, 적폐는 한순간에 청산될 수 없었다. 사화와 옥사로 귀양 가고 죽은 이들을 복권하고 재등용하고, 윤원형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린 이들을 처단해야 했다. 단지 중앙의 인사만 바꾸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각종 사업을 위해 내수사라는 기관을 활용했는데, 내수사가 특히 기승을 부린 지역이 황해도였다. 황해도의 갈대밭은 그 멋진 풍경 때문에 내수사가 탐을 낸 것이 아니다. 이곳의 품질 좋은 갈대는 갖가지 물품을 만들고 한약재로도 활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자원이었다. 갈대밭만이 아니라 이 일대의 간척지 역시 내수사와 당대의 권세가들이 탐내던 땅이었다. 명종 대의 유명한 도둑 임꺽정이 황해도 일대를 휩쓴 데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다(<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폐단은 말단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절에 문정왕후는 아들의 건강과 세자의 탄생을 빌며 내수사의 재원을 동원하여 불화 400점을 제작했다. 짙은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으로 그린 화려한 불화는 당대 굶어 죽어가던 백성들의 피로 그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유림은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그녀가 사랑했던 지방의 각종 신사들이나 사찰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문정왕후의 지우를 받던 승려 보우가 머물던 양주 회암사가 대표적이었다. 한때 250여명의 승려가 머물고 경내 규모만 1만여평에 달하던 이 절은 선비들의 방화로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제주목사 변협에게 맞아 죽었다.
부숴버리고, 불태워버리고, 사람을 때려죽일 정도의 이 격렬함은 전대의 적폐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얼마나 극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앙정치의 격렬한 대립 역시 이러한 당대의 분노와 적폐 청산에 대한 열정에서 기인했다. 동서 분당의 역사는 이 적폐 청산의 길이 얼마나 험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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