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 폰테크 [에프워드] ‘위안부’ 생존자, 다른 이름은 ‘기적’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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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폰테크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선생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상에 처음으로 증언했다. 당시 그는 “일본 정부가 정신대를 부인하는 것이 너무 기가 막혀 증언하게 됐다”며 약 50년의 침묵을 깬 이유를 밝혔다. 그가 나서기 전에도 ‘마을 처녀들이 일본군에 끌려갔다’ 류의 풍문이 한국 내에 존재했지만, 김학순 선생의 증언을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 여성 인권 의제로 올라섰다. 그가 세상에 나온 8월 14일은 아시아연대회의(2012년)와 한국 정부(2017)에 의해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로 지정됐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베트남,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일본 등에 위안소를 만들었다. 여러 종류의 위안소에서 성착취를 당한 피해 여성의 규모를 정확하게 집계할 수는 없다. 5만명에서 20만명이라는 피해 규모 추정치만 존재한다. 1931년 만주 점령을 시작으로 큰 피해를 당한 중국 지역에서 사례가 계속해서 발굴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총 40만명에 달할 수 있다는 중국 학계의 분석도 나온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어떠한 고난을 겪었는지는 형언할 수 없다. 그들의 구술은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피폐해질 정도로 잔인하며 참혹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상당한 피해자가 살해당했거나 살아남고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번 [에프워드]는 전 세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었는지, 현 시대에 그 기적의 의미는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위안부(Comfort Women)’는 일본 측 문서와 ‘일본군에 위안부란 것이 있더라’고 기록한 연합군의 문서 등에 등장하는 용어다. 전시에 일본 군인에게 ‘위안’을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철저히 가해자의 시선만이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이 용어에 반발을 표했고, 대안으로 일본군(전시) ‘성노예’라는 표현이 혼용된다. 한편으로 피해자를 지칭하기에 ‘성노예’란 말의 수위가 너무 높은지라 이 역시 반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여러 이유로 ‘위안부’를 쓰는 이들은 가해자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자 일종의 용어로서 작은따옴표(‘’)를 붙이기도 한다. 이 글도 그러한 표기를 따른다.
여러 구술과 연구를 보면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자신이 ‘위안부’로 불렸다는 것과 더불어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 등 일본군의 체계적인 구조를 모르기도 했다. 초경도 시작하기 전의 어린 나이에 끌려간 사례도 흔한 데다, 그 안에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되짚어보기는커녕 숨기고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난 일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던 피해자들은 1991년 김학순 선생의 소식을 접한다. 김학순 선생의 용기에 ‘나도 말해야겠다’고 나선 이들의 증언이 하나 둘 모인 것이 현재 존재하는 ‘위안부’ 연구와 집단기억의 밑바탕이 됐다. ‘위안부’ 생존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마중물이 되며 증언에 나섰다.
1944년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일본군에 끌려간 네덜란드 여성 얀 루프-오헤른은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원제: 50년 동안의 침묵)>에서 1992년 TV로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일을 전한다. 그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 온 이야기를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위안부’였던 적이 없다. 우리는 ‘전쟁 강간 피해자’들이다. 일본 제국 군대에 의해 징발돼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다”며 오랜 침묵을 깼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증언한 첫 유럽인이며, 평화와 여성 인권을 위한 활동을 벌여 네덜란드 국왕과 교황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중국 여성 완아이화도 ‘위안부’를 둘러싼 시선을 바로잡고 싶었음을 밝힌다. 그는 1943년 중국 산시성에서 일본군에게 무려 3차례나 끌려갔다.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으나 다시 붙잡혀 갔고, 그때마다 더 큰 고문을 겪어 영구적인 장해가 남았다. 그는 <중국의 ‘위안부’ 여성>에서 “나는 일본군이 나를 어떻게 납치해 자신들의 성노예가 되도록 강요했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나섰다.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인들에게 자행한 잔혹 행위를 세계가 알기를 바라며, 나와 같은 고통을 겪은 모든 여성을 위해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일본군은 침략·점령한 사실상의 모든 지역에서 ‘위안부’와 민간 여성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질렀다. 그렇지만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모든 피해 지역에서 고르게 나타난 건 아니다. 피해자들의 말하기는 그 자신이 속한 사회의 영향을 무척 크게 받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발생한 국가들은 현대사의 격랑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쟁, 분단, 권위주의 통치 등 국가와 사회를 휩쓰는 지배적인 사상이 수시로 흔들리고 자리잡는 과정에서 여성 개인의 목소리는 나오기 어려웠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최초의 위안소는 1932년 중국 상하이로 알려져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하이난을 포함한 중국 전역으로 위안소가 확대된다. 그만큼 중국 여성의 피해가 극심했지만, 중국에서 ‘위안부’ 생존자 발굴과 담론 형성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중국 ‘위안부’ 생존자의 구술을 검증하고 기록한 책 <중국의 ‘위안부’ 여성>은 “수십 년 동안 사회·정치적 환경은 이들을 침묵하게 했고, 이들의 고통은 국민국가가 만든 영웅적인 전후 서사에서 배제됐다”며 “이 중국인 생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지난 20년 동안의 일”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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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도리어 형사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움직임 하에서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여성의 정절과 순결을 중시하는 유교적 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1940년 중국 우한에서 일자리 광고에 속아 위안소로 끌려간 위안주린은 일본 패망으로부터 한참이 지난 1958년 다시 고난을 맞이한다. ‘일본인을 위해 일한 성매매 여성’이었다는 비난에 처해 집도 몰수당하고 중국 북부 헤이룽장으로 강제이주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17년 동안 중노동을 했고, 1975년에야 우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이 패전 이후 오래지 않아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점도 피해자의 말하기를 둘러싼 정치적 셈법을 복잡하게 했다. 일본군이 과거 주둔했던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일본은 이 지역의 공적개발원조(ODA)와 해외직접투자(FDI) 주요 공여국이다. 일본과의 경제적 관계 때문에 ‘위안부’ 운동이 어렵다는 설명은 베트남, 필리핀, 동티모르 등 여러 동남아 국가에 적용된다.
지난해 발표된 논문 <베트남의 ‘위안부’: 기억 없는 역사>는 베트남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드러나지 않은 이유와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베트남에서 생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배경을 분석했다. 분단 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모두 권위주의 체제로 이행했고, 각자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선전했다. 이는 곧 ‘위안부’의 이야기가 환영받기 어려운 정치적 공간이었음을 뜻한다.
여기에 더해 논문은 “베트남은 일본에게서 어떠한 공식적 형태의 배상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규명하려는 움직임은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일본의 ODA와 FDI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해석했다. 논문은 또 일본과 베트남이 대중국 견제를 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군사협력 역시 “베트남 정부가 ‘위안부’ 공개 논의를 주저할 또 다른 이유”라고 봤다. 이 맥락에서 보면 베트남은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가 드러나기 극도로 힘든 사회다.
여러 국가의 ‘위안부’ 논의를 다룬 책 <그녀의 일생>에는 저자가 필리핀 ‘위안부’ 운동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필리핀 사회의 흐름을 평가한 내용이 담겼다. 저자는 “필리핀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자금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위안부’ 운동에 호의적이지 않다”고 봤다. 시민단체가 ‘위안부’ 기념 조각상을 세운 것에 일본이 강하게 항의하자 조각상이 갑자기 사라진 일화가 대표적이다. 필리핀에선 마리아 로사 헨슨이 ‘위안부’ 문제를 처음 증언한 이후 많은 생존자가 뒤따랐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교육과정과 정부의 관심에선 벗어난 채 시민단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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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에서도 ‘잊혀진’ 생존자가 있다. 한반도 출신으로 ‘위안부’ 피해 경험을 밝힌 첫 생존자는 오키나와로 끌려갔던 배봉기 선생이었다.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오키나와에 머물렀는데,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며 그는 1945년 8월15일 이전에 입국한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1975년 오키나와로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반강제로 드러났고 언론에 노출됐다. 생전 그는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에게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1970년대 당시 배봉기 선생을 도우려던 이들은 존재했지만, ‘위안부’ 운동이 불붙은 1990년대에 비하면 여러 환경이 척박했다. 한국에서도 ‘위안부’ 생존자의 말하기는 민주화, 시민사회 형성, 성평등 의식 성장 등이 전제된 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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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을 보면 이들은 살아남은 후에도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처럼 ‘학습된’ 본능이 지금도 피해자의 입을 막고 있을지 모른다. 피해자에게 감히 ‘말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나도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그 말하기를 막는 것이 이 세상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우리 앞에 나타난 ‘위안부’ 생존자는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각국의 정치적 여건, 조력자, 가족들의 격려, 피해자를 비난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일본과의 경제·외교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사자의 결심과 용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맞물려 세상은 ‘위안부’ 생존자의 고백을 듣게 됐다. 끝내 마음에만 묻어둔 이들, 말하고 싶어도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들까지 생각해 보면 증언 하나하나가 전부 기적이다.
그렇게 어렵게 세상에 나온 생존자들은 하나둘씩 눈을 감고 있다. 한국만 놓고 보면 정부에 등록된 이들 중 단 5명만 남았다. 생존자가 줄어가고 있는 현실은 다른 나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기적과도 같은 한 분 한 분을 떠나 보낼 때마다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세상이 도래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위안부’ 생존자 모욕은 너무 흔하고, ‘전쟁과 성폭력 없는 세상’은 멀게만 느껴진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이 국가와 군에 의해 강제동원된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해야만 일본이 전쟁범죄 혐의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랫]“나를 여성인권운동가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플랫]경향신문이 전했던 ‘여성운동가 길원옥’의 발자취
전시 ‘위안부’ 제도는 극단적인 여성 차별과 성노예화였다. 그 극단성은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보편성에서 태어났다. 사회에 공기처럼 스며든 여성 성상품화, 대상화, 성매매, 강간 문화, 성착취 등을 먹고 자란 것이다. ‘전쟁 나면 주변 여자들부터 강간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온라인에 글을 쓰는 이들을 볼 때면 성범죄를 유흥 취급하는 이 ‘가해자 마인드’를 어떻게 뿌리뽑을 수 있을지 아득해진다. 지금도 전쟁과 무력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지구촌 어느 구석에선 여성들이 약소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멸시해도 마땅한’ 민족이라는 이유로, 가장 근본적으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착취에 내몰리고 있다.
이는 전부 여성을 사람이 아닌 ‘걸어다니는 성기’쯤으로 보는 시선의 발로다. 인류가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된 건(봐야 된다고 배우게 된 건) 인류사에 비춰 아주 최근의 일이다. 여성도 인간의 범주에 끼워주는 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위안부’ 생존자의 외침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왜 잊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여성도 인간이다’가 실현된 세상일 것이다.
▼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슈트 팬츠 자른 형상…반듯한 허리선에 핀턱·주름 특징바짓단은 다리 비교적 가는 부분 지나게 하는 게 중요상의는 티셔츠로 충분…색 통일하면 정돈된 느낌
말복 무렵이면 계절로는 여름의 끝자락에 다다른 셈이지만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더위는 멋을 부리는 일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엇을 입어도 덥고, 옷을 여러 겹 갖춰 입는 일은 더욱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입고 나갈 수도 없다. 출근해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며, 때로는 제법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도 가야 한다. 옷차림은 가볍게 덜어내되 스타일은 남겨야 하는 계절이다.
여름이 되면 가장 먼저 짧아지는 것은 바지의 길이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길이부터 무릎 위에서 끝나는 길이, 무릎을 덮거나 종아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길이까지, 지금은 어느 한 가지 길이만 유행한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택지가 다양하다. 같은 쇼츠(반바지)라도 길이와 품, 소재에 따라 휴양지 차림이 되기도 하고 출근할 때 입을 수 있는 단정한 옷이 되기도 한다.
그중 평소 정갈하고 성숙한 옷차림을 좋아한다면 테일러드 쇼츠가 적당하다. 테일러드 쇼츠는 말 그대로 슈트 팬츠의 길이를 무릎 부근에서 잘라낸 것 같은 바지다. 허리선이 반듯하고 지퍼와 후크 여밈을 사용하며, 앞면에는 핀턱이나 주름이 들어간다. 뒤쪽에는 입술주머니가 달리기도 한다. 이런 디테일 덕분에 다리가 드러나는데도 가벼운 휴양지 옷처럼 보이지 않는다.
테일러드 쇼츠는 스커트의 대안이자 한여름 슈트 팬츠의 답답함을 덜어주는 옷이기도 하다. 스커트보다 움직임이 편하고 긴 말팬츠보다 시원하면서도, 셔츠와 재킷, 로퍼 같은 기존의 출근 복장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옷장을 새로 구성할 필요 없이 평소 슈트 팬츠 자리에 쇼츠만 바꾸어 넣어도 계절에 맞는 옷차림이 완성된다. 티셔츠를 입으면 간결한 출근복이 되고, 넉넉한 셔츠나 재킷을 더하면 조금 더 갖춰 입은 모습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품이다. 테일러드 쇼츠라고 해서 몸에 꼭 맞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엉덩이와 허벅지에 약간의 여유가 있고, 바짓단까지 직선에 가깝게 떨어지는 핏이 세련돼 보인다. 앞주름이 잡힌 디자인은 앉거나 걸을 때 필요한 여유를 만들어주고 바지 앞면이 몸에 달라붙는 것도 막아준다. 길이는 무릎뼈 위에서 끝나는 것부터 무릎을 완전히 덮는 것까지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유행하는 길이를 그대로 고르는 것이 아니라, 바짓단이 다리의 비교적 가는 지점에 놓이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쇼츠가 어중간해 보이는 이유는 길이 자체보다 바짓단이 다리의 가장 굵은 부분을 가로지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바짓단의 위치를 몇㎝만 조절해도 전체적인 비례가 달라진다.
상의는 복잡할 필요가 없다. 목둘레가 쉽게 늘어나지 않는 질 좋은 티셔츠를 넣어 입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티셔츠와 쇼츠의 색을 같거나 비슷하게 맞추면 한 벌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져 몸의 선도 길어 보인다. 검정 테일러드 쇼츠에 검정 티셔츠를 입고 벨트와 가방, 신발까지 검정으로 통일하면 가짓수는 적어도 전체적 인상은 또렷해진다. 느슨한 실루엣을 올블랙이나 네이비, 짙은 갈색처럼 제한된 색 안에서 정리하면 편안한 옷도 흐트러져 보이지 않는다.
쇼츠의 분위기를 결정할 때 디자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소재다. 리넨은 여름 대표 소재다. 공기가 잘 통하고 수분을 흡수한 뒤 비교적 빨리 마르며, 피부에 달라붙지 않아 더운 날 입기 좋다. 손끝에 느껴지는 보송하고 서늘한 감촉도 장점이다. 다만 리넨은 쉽게 구겨진다. 그 구김을 리넨 특유의 자연스러운 멋으로 받아들인다면 괜찮지만 온종일 반듯한 인상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구김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면 아주 얇고 흐물거리는 리넨보다 어느 정도 두께와 밀도가 있는 원단을 고르는 편이 낫다. 면이나 울을 섞은 혼방 소재도 형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면은 리넨보다 대중적이고 관리하기 편하다. 특히 가볍고 촘촘한 면 포플린은 표면이 매끈하고 형태가 단정하게 잡혀 셔츠나 재킷과 잘 어울린다. 리넨처럼 거친 질감과 잦은 구김이 부담스럽고, 울 소재를 선택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면 면 쇼츠가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다만 지나치게 두껍고 단단한 면은 한여름에 답답할 수 있으므로 손에 들었을 때 가볍고 유연한 것을 고르는 편이 좋다.
조금 더 포멀한 테일러드 쇼츠에는 여름용 울이 잘 어울린다. 울이라고 하면 두껍고 따뜻한 겨울옷을 먼저 떠올리기 쉽겠지만 옷감의 계절감은 섬유 자체보다 실의 굵기와 직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그중 트로피컬 울은 더운 날씨를 위한 대표적인 슈트 소재다. 일반적으로 가늘고 긴 섬유를 빗어 만든 소모사를 사용하며 실을 단단히 꼬아 표면을 매끈하고 탄탄하게 만든다. 피부에 달라붙지 않고 몸에서 약간 떨어지며, 표면이 보송하고 리넨처럼 크게 구겨지지 않는다. 트로피컬 울 쇼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옷의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에게 적당하다. 오래 앉아 있어도 면이나 리넨보다 무릎이 덜 나오고, 일어나서 손으로 가볍게 정리하면 주름도 비교적 쉽게 펴진다.
울과 리넨을 섞은 소재는 두 섬유의 중간 지점에 있다. 리넨의 서늘하고 자연스러운 표면은 살리면서 울의 탄력과 드레이프를 더해 순수 리넨보다 구김이 적다. 면보다 시원하게 느껴지고, 리넨보다 바지의 선이 단정하게 떨어진다. 여행이나 장시간 외출처럼 여러 시간 동안 옷의 형태가 유지되어야 할 때도 유용하다. 여름의 끝자락부터 초가을까지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울·리넨 혼방 소재가 자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다. 여름 소재 특유의 가벼움은 지니되 지나치게 가벼워 보이지 않고, 적당한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몸에 달라붙지 않고 통기성이 좋아 계절이 조금 바뀐 뒤까지 입을 수 있다.
무릎 길이 쇼츠는 긴 바지의 답답함과 짧은 반바지의 부담 사이에서 가장 현실적인 균형을 이룬 옷이다. 지나치게 짧지 않은 길이, 허벅지를 조이지 않는 여유, 허리부터 바짓단까지 곧게 떨어지는 실루엣만 기억하면 된다. 계절의 끝이 가까워져도 더위가 이어지는 동안은 물론 선선한 초가을이 시작될 때까지 충분히 입을 수 있다.
심장병 환자를 돕기 위한 캠페인의 주제가로 ‘파초’란 노래가 있었다. 쌍둥이 듀엣 ‘수와 진’이 불러 히트를 쳤지. 가사를 쓴 이건우 선생은 쌍둥이 형제가 군대 가기 전에 만났는데 하도 씩씩해서 담에 만나면 좋은 노랠 하나 줘야겠다 별렀대. 이후 명동성당 길에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 가두 모금공연을 하던 수와 진을 만나자 당장 ‘파초’를 지어 건넸대. “불꽃처럼 살아야 해. 오늘도 어제처럼 저 들판의 풀잎처럼 우린 쓰러지지 말아야 해. 모르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행여나 돌아서서 우리 미워하지 말아야 해. 하늘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날까지 순하고 아름답게 오늘을 살아야 해.”
요새 아이돌 앳된 남성 가수들을 보면 얼굴이 다 비스무리 닮았다. 다섯 쌍둥이인가 여섯 쌍둥이인가. 얼굴 말고 마음씨도 고와서 ‘수와 진’처럼 그늘진 자리를 살펴볼 줄 알았으면 좋겠어. 장애를 가진 이웃들을 노래로, 또 물심양면 보살피는 가수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 집에도 파초 한 그루 있었지. 여름마다 그늘을 드리우며 울창했지. 언젠가 겨울에 한파가 닥쳐 뿌리째 얼어 죽고 말았다. 톱밥을 구해 덮어주고 부산을 떨었는데도 말이야. 파초가 아닌 바나나 나무도 충분히 살 것 같은 요새 여름 날씨. 겨울 추위와 여름 더위가 참말 극단적이다.
엊그제 조계종 한 절집에 특별한 강좌가 있어 갔는데, 뉘집 담장 안쪽에 파초가 울창해 탐이 나더라. 탐심도 죄라던가. 그간 교회에다가 너무 많은 죄를 쏟아낸 거 같아서리 이번엔 절집에서 참회했다. 파초 욕심도 버렸다. 키우다 또 죽일까봐.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베트남,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일본 등에 위안소를 만들었다. 여러 종류의 위안소에서 성착취를 당한 피해 여성의 규모를 정확하게 집계할 수는 없다. 5만명에서 20만명이라는 피해 규모 추정치만 존재한다. 1931년 만주 점령을 시작으로 큰 피해를 당한 중국 지역에서 사례가 계속해서 발굴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총 40만명에 달할 수 있다는 중국 학계의 분석도 나온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어떠한 고난을 겪었는지는 형언할 수 없다. 그들의 구술은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피폐해질 정도로 잔인하며 참혹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상당한 피해자가 살해당했거나 살아남고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번 [에프워드]는 전 세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었는지, 현 시대에 그 기적의 의미는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위안부(Comfort Women)’는 일본 측 문서와 ‘일본군에 위안부란 것이 있더라’고 기록한 연합군의 문서 등에 등장하는 용어다. 전시에 일본 군인에게 ‘위안’을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철저히 가해자의 시선만이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이 용어에 반발을 표했고, 대안으로 일본군(전시) ‘성노예’라는 표현이 혼용된다. 한편으로 피해자를 지칭하기에 ‘성노예’란 말의 수위가 너무 높은지라 이 역시 반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여러 이유로 ‘위안부’를 쓰는 이들은 가해자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자 일종의 용어로서 작은따옴표(‘’)를 붙이기도 한다. 이 글도 그러한 표기를 따른다.
여러 구술과 연구를 보면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자신이 ‘위안부’로 불렸다는 것과 더불어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 등 일본군의 체계적인 구조를 모르기도 했다. 초경도 시작하기 전의 어린 나이에 끌려간 사례도 흔한 데다, 그 안에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되짚어보기는커녕 숨기고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난 일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던 피해자들은 1991년 김학순 선생의 소식을 접한다. 김학순 선생의 용기에 ‘나도 말해야겠다’고 나선 이들의 증언이 하나 둘 모인 것이 현재 존재하는 ‘위안부’ 연구와 집단기억의 밑바탕이 됐다. ‘위안부’ 생존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마중물이 되며 증언에 나섰다.
1944년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일본군에 끌려간 네덜란드 여성 얀 루프-오헤른은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원제: 50년 동안의 침묵)>에서 1992년 TV로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일을 전한다. 그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 온 이야기를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위안부’였던 적이 없다. 우리는 ‘전쟁 강간 피해자’들이다. 일본 제국 군대에 의해 징발돼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다”며 오랜 침묵을 깼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증언한 첫 유럽인이며, 평화와 여성 인권을 위한 활동을 벌여 네덜란드 국왕과 교황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중국 여성 완아이화도 ‘위안부’를 둘러싼 시선을 바로잡고 싶었음을 밝힌다. 그는 1943년 중국 산시성에서 일본군에게 무려 3차례나 끌려갔다.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으나 다시 붙잡혀 갔고, 그때마다 더 큰 고문을 겪어 영구적인 장해가 남았다. 그는 <중국의 ‘위안부’ 여성>에서 “나는 일본군이 나를 어떻게 납치해 자신들의 성노예가 되도록 강요했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나섰다.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인들에게 자행한 잔혹 행위를 세계가 알기를 바라며, 나와 같은 고통을 겪은 모든 여성을 위해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일본군은 침략·점령한 사실상의 모든 지역에서 ‘위안부’와 민간 여성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질렀다. 그렇지만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모든 피해 지역에서 고르게 나타난 건 아니다. 피해자들의 말하기는 그 자신이 속한 사회의 영향을 무척 크게 받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발생한 국가들은 현대사의 격랑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쟁, 분단, 권위주의 통치 등 국가와 사회를 휩쓰는 지배적인 사상이 수시로 흔들리고 자리잡는 과정에서 여성 개인의 목소리는 나오기 어려웠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최초의 위안소는 1932년 중국 상하이로 알려져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하이난을 포함한 중국 전역으로 위안소가 확대된다. 그만큼 중국 여성의 피해가 극심했지만, 중국에서 ‘위안부’ 생존자 발굴과 담론 형성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중국 ‘위안부’ 생존자의 구술을 검증하고 기록한 책 <중국의 ‘위안부’ 여성>은 “수십 년 동안 사회·정치적 환경은 이들을 침묵하게 했고, 이들의 고통은 국민국가가 만든 영웅적인 전후 서사에서 배제됐다”며 “이 중국인 생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지난 20년 동안의 일”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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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도리어 형사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움직임 하에서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여성의 정절과 순결을 중시하는 유교적 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1940년 중국 우한에서 일자리 광고에 속아 위안소로 끌려간 위안주린은 일본 패망으로부터 한참이 지난 1958년 다시 고난을 맞이한다. ‘일본인을 위해 일한 성매매 여성’이었다는 비난에 처해 집도 몰수당하고 중국 북부 헤이룽장으로 강제이주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17년 동안 중노동을 했고, 1975년에야 우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이 패전 이후 오래지 않아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점도 피해자의 말하기를 둘러싼 정치적 셈법을 복잡하게 했다. 일본군이 과거 주둔했던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일본은 이 지역의 공적개발원조(ODA)와 해외직접투자(FDI) 주요 공여국이다. 일본과의 경제적 관계 때문에 ‘위안부’ 운동이 어렵다는 설명은 베트남, 필리핀, 동티모르 등 여러 동남아 국가에 적용된다.
지난해 발표된 논문 <베트남의 ‘위안부’: 기억 없는 역사>는 베트남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드러나지 않은 이유와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베트남에서 생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배경을 분석했다. 분단 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모두 권위주의 체제로 이행했고, 각자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선전했다. 이는 곧 ‘위안부’의 이야기가 환영받기 어려운 정치적 공간이었음을 뜻한다.
여기에 더해 논문은 “베트남은 일본에게서 어떠한 공식적 형태의 배상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규명하려는 움직임은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일본의 ODA와 FDI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해석했다. 논문은 또 일본과 베트남이 대중국 견제를 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군사협력 역시 “베트남 정부가 ‘위안부’ 공개 논의를 주저할 또 다른 이유”라고 봤다. 이 맥락에서 보면 베트남은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가 드러나기 극도로 힘든 사회다.
여러 국가의 ‘위안부’ 논의를 다룬 책 <그녀의 일생>에는 저자가 필리핀 ‘위안부’ 운동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필리핀 사회의 흐름을 평가한 내용이 담겼다. 저자는 “필리핀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자금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위안부’ 운동에 호의적이지 않다”고 봤다. 시민단체가 ‘위안부’ 기념 조각상을 세운 것에 일본이 강하게 항의하자 조각상이 갑자기 사라진 일화가 대표적이다. 필리핀에선 마리아 로사 헨슨이 ‘위안부’ 문제를 처음 증언한 이후 많은 생존자가 뒤따랐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교육과정과 정부의 관심에선 벗어난 채 시민단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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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에서도 ‘잊혀진’ 생존자가 있다. 한반도 출신으로 ‘위안부’ 피해 경험을 밝힌 첫 생존자는 오키나와로 끌려갔던 배봉기 선생이었다.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오키나와에 머물렀는데,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며 그는 1945년 8월15일 이전에 입국한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1975년 오키나와로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반강제로 드러났고 언론에 노출됐다. 생전 그는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에게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1970년대 당시 배봉기 선생을 도우려던 이들은 존재했지만, ‘위안부’ 운동이 불붙은 1990년대에 비하면 여러 환경이 척박했다. 한국에서도 ‘위안부’ 생존자의 말하기는 민주화, 시민사회 형성, 성평등 의식 성장 등이 전제된 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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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을 보면 이들은 살아남은 후에도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처럼 ‘학습된’ 본능이 지금도 피해자의 입을 막고 있을지 모른다. 피해자에게 감히 ‘말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나도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그 말하기를 막는 것이 이 세상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우리 앞에 나타난 ‘위안부’ 생존자는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각국의 정치적 여건, 조력자, 가족들의 격려, 피해자를 비난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일본과의 경제·외교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사자의 결심과 용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맞물려 세상은 ‘위안부’ 생존자의 고백을 듣게 됐다. 끝내 마음에만 묻어둔 이들, 말하고 싶어도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들까지 생각해 보면 증언 하나하나가 전부 기적이다.
그렇게 어렵게 세상에 나온 생존자들은 하나둘씩 눈을 감고 있다. 한국만 놓고 보면 정부에 등록된 이들 중 단 5명만 남았다. 생존자가 줄어가고 있는 현실은 다른 나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기적과도 같은 한 분 한 분을 떠나 보낼 때마다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세상이 도래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위안부’ 생존자 모욕은 너무 흔하고, ‘전쟁과 성폭력 없는 세상’은 멀게만 느껴진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이 국가와 군에 의해 강제동원된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해야만 일본이 전쟁범죄 혐의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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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위안부’ 제도는 극단적인 여성 차별과 성노예화였다. 그 극단성은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보편성에서 태어났다. 사회에 공기처럼 스며든 여성 성상품화, 대상화, 성매매, 강간 문화, 성착취 등을 먹고 자란 것이다. ‘전쟁 나면 주변 여자들부터 강간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온라인에 글을 쓰는 이들을 볼 때면 성범죄를 유흥 취급하는 이 ‘가해자 마인드’를 어떻게 뿌리뽑을 수 있을지 아득해진다. 지금도 전쟁과 무력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지구촌 어느 구석에선 여성들이 약소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멸시해도 마땅한’ 민족이라는 이유로, 가장 근본적으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착취에 내몰리고 있다.
이는 전부 여성을 사람이 아닌 ‘걸어다니는 성기’쯤으로 보는 시선의 발로다. 인류가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된 건(봐야 된다고 배우게 된 건) 인류사에 비춰 아주 최근의 일이다. 여성도 인간의 범주에 끼워주는 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위안부’ 생존자의 외침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왜 잊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여성도 인간이다’가 실현된 세상일 것이다.
▼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슈트 팬츠 자른 형상…반듯한 허리선에 핀턱·주름 특징바짓단은 다리 비교적 가는 부분 지나게 하는 게 중요상의는 티셔츠로 충분…색 통일하면 정돈된 느낌
말복 무렵이면 계절로는 여름의 끝자락에 다다른 셈이지만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더위는 멋을 부리는 일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엇을 입어도 덥고, 옷을 여러 겹 갖춰 입는 일은 더욱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입고 나갈 수도 없다. 출근해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며, 때로는 제법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도 가야 한다. 옷차림은 가볍게 덜어내되 스타일은 남겨야 하는 계절이다.
여름이 되면 가장 먼저 짧아지는 것은 바지의 길이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길이부터 무릎 위에서 끝나는 길이, 무릎을 덮거나 종아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길이까지, 지금은 어느 한 가지 길이만 유행한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택지가 다양하다. 같은 쇼츠(반바지)라도 길이와 품, 소재에 따라 휴양지 차림이 되기도 하고 출근할 때 입을 수 있는 단정한 옷이 되기도 한다.
그중 평소 정갈하고 성숙한 옷차림을 좋아한다면 테일러드 쇼츠가 적당하다. 테일러드 쇼츠는 말 그대로 슈트 팬츠의 길이를 무릎 부근에서 잘라낸 것 같은 바지다. 허리선이 반듯하고 지퍼와 후크 여밈을 사용하며, 앞면에는 핀턱이나 주름이 들어간다. 뒤쪽에는 입술주머니가 달리기도 한다. 이런 디테일 덕분에 다리가 드러나는데도 가벼운 휴양지 옷처럼 보이지 않는다.
테일러드 쇼츠는 스커트의 대안이자 한여름 슈트 팬츠의 답답함을 덜어주는 옷이기도 하다. 스커트보다 움직임이 편하고 긴 말팬츠보다 시원하면서도, 셔츠와 재킷, 로퍼 같은 기존의 출근 복장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옷장을 새로 구성할 필요 없이 평소 슈트 팬츠 자리에 쇼츠만 바꾸어 넣어도 계절에 맞는 옷차림이 완성된다. 티셔츠를 입으면 간결한 출근복이 되고, 넉넉한 셔츠나 재킷을 더하면 조금 더 갖춰 입은 모습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품이다. 테일러드 쇼츠라고 해서 몸에 꼭 맞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엉덩이와 허벅지에 약간의 여유가 있고, 바짓단까지 직선에 가깝게 떨어지는 핏이 세련돼 보인다. 앞주름이 잡힌 디자인은 앉거나 걸을 때 필요한 여유를 만들어주고 바지 앞면이 몸에 달라붙는 것도 막아준다. 길이는 무릎뼈 위에서 끝나는 것부터 무릎을 완전히 덮는 것까지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유행하는 길이를 그대로 고르는 것이 아니라, 바짓단이 다리의 비교적 가는 지점에 놓이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쇼츠가 어중간해 보이는 이유는 길이 자체보다 바짓단이 다리의 가장 굵은 부분을 가로지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바짓단의 위치를 몇㎝만 조절해도 전체적인 비례가 달라진다.
상의는 복잡할 필요가 없다. 목둘레가 쉽게 늘어나지 않는 질 좋은 티셔츠를 넣어 입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티셔츠와 쇼츠의 색을 같거나 비슷하게 맞추면 한 벌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져 몸의 선도 길어 보인다. 검정 테일러드 쇼츠에 검정 티셔츠를 입고 벨트와 가방, 신발까지 검정으로 통일하면 가짓수는 적어도 전체적 인상은 또렷해진다. 느슨한 실루엣을 올블랙이나 네이비, 짙은 갈색처럼 제한된 색 안에서 정리하면 편안한 옷도 흐트러져 보이지 않는다.
쇼츠의 분위기를 결정할 때 디자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소재다. 리넨은 여름 대표 소재다. 공기가 잘 통하고 수분을 흡수한 뒤 비교적 빨리 마르며, 피부에 달라붙지 않아 더운 날 입기 좋다. 손끝에 느껴지는 보송하고 서늘한 감촉도 장점이다. 다만 리넨은 쉽게 구겨진다. 그 구김을 리넨 특유의 자연스러운 멋으로 받아들인다면 괜찮지만 온종일 반듯한 인상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구김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면 아주 얇고 흐물거리는 리넨보다 어느 정도 두께와 밀도가 있는 원단을 고르는 편이 낫다. 면이나 울을 섞은 혼방 소재도 형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면은 리넨보다 대중적이고 관리하기 편하다. 특히 가볍고 촘촘한 면 포플린은 표면이 매끈하고 형태가 단정하게 잡혀 셔츠나 재킷과 잘 어울린다. 리넨처럼 거친 질감과 잦은 구김이 부담스럽고, 울 소재를 선택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면 면 쇼츠가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다만 지나치게 두껍고 단단한 면은 한여름에 답답할 수 있으므로 손에 들었을 때 가볍고 유연한 것을 고르는 편이 좋다.
조금 더 포멀한 테일러드 쇼츠에는 여름용 울이 잘 어울린다. 울이라고 하면 두껍고 따뜻한 겨울옷을 먼저 떠올리기 쉽겠지만 옷감의 계절감은 섬유 자체보다 실의 굵기와 직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그중 트로피컬 울은 더운 날씨를 위한 대표적인 슈트 소재다. 일반적으로 가늘고 긴 섬유를 빗어 만든 소모사를 사용하며 실을 단단히 꼬아 표면을 매끈하고 탄탄하게 만든다. 피부에 달라붙지 않고 몸에서 약간 떨어지며, 표면이 보송하고 리넨처럼 크게 구겨지지 않는다. 트로피컬 울 쇼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옷의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에게 적당하다. 오래 앉아 있어도 면이나 리넨보다 무릎이 덜 나오고, 일어나서 손으로 가볍게 정리하면 주름도 비교적 쉽게 펴진다.
울과 리넨을 섞은 소재는 두 섬유의 중간 지점에 있다. 리넨의 서늘하고 자연스러운 표면은 살리면서 울의 탄력과 드레이프를 더해 순수 리넨보다 구김이 적다. 면보다 시원하게 느껴지고, 리넨보다 바지의 선이 단정하게 떨어진다. 여행이나 장시간 외출처럼 여러 시간 동안 옷의 형태가 유지되어야 할 때도 유용하다. 여름의 끝자락부터 초가을까지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울·리넨 혼방 소재가 자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다. 여름 소재 특유의 가벼움은 지니되 지나치게 가벼워 보이지 않고, 적당한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몸에 달라붙지 않고 통기성이 좋아 계절이 조금 바뀐 뒤까지 입을 수 있다.
무릎 길이 쇼츠는 긴 바지의 답답함과 짧은 반바지의 부담 사이에서 가장 현실적인 균형을 이룬 옷이다. 지나치게 짧지 않은 길이, 허벅지를 조이지 않는 여유, 허리부터 바짓단까지 곧게 떨어지는 실루엣만 기억하면 된다. 계절의 끝이 가까워져도 더위가 이어지는 동안은 물론 선선한 초가을이 시작될 때까지 충분히 입을 수 있다.
심장병 환자를 돕기 위한 캠페인의 주제가로 ‘파초’란 노래가 있었다. 쌍둥이 듀엣 ‘수와 진’이 불러 히트를 쳤지. 가사를 쓴 이건우 선생은 쌍둥이 형제가 군대 가기 전에 만났는데 하도 씩씩해서 담에 만나면 좋은 노랠 하나 줘야겠다 별렀대. 이후 명동성당 길에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 가두 모금공연을 하던 수와 진을 만나자 당장 ‘파초’를 지어 건넸대. “불꽃처럼 살아야 해. 오늘도 어제처럼 저 들판의 풀잎처럼 우린 쓰러지지 말아야 해. 모르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행여나 돌아서서 우리 미워하지 말아야 해. 하늘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날까지 순하고 아름답게 오늘을 살아야 해.”
요새 아이돌 앳된 남성 가수들을 보면 얼굴이 다 비스무리 닮았다. 다섯 쌍둥이인가 여섯 쌍둥이인가. 얼굴 말고 마음씨도 고와서 ‘수와 진’처럼 그늘진 자리를 살펴볼 줄 알았으면 좋겠어. 장애를 가진 이웃들을 노래로, 또 물심양면 보살피는 가수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 집에도 파초 한 그루 있었지. 여름마다 그늘을 드리우며 울창했지. 언젠가 겨울에 한파가 닥쳐 뿌리째 얼어 죽고 말았다. 톱밥을 구해 덮어주고 부산을 떨었는데도 말이야. 파초가 아닌 바나나 나무도 충분히 살 것 같은 요새 여름 날씨. 겨울 추위와 여름 더위가 참말 극단적이다.
엊그제 조계종 한 절집에 특별한 강좌가 있어 갔는데, 뉘집 담장 안쪽에 파초가 울창해 탐이 나더라. 탐심도 죄라던가. 그간 교회에다가 너무 많은 죄를 쏟아낸 거 같아서리 이번엔 절집에서 참회했다. 파초 욕심도 버렸다. 키우다 또 죽일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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