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의 역사 상상력]조선 왕조에 저항·과거 응시 거부?…고려 수도의 ‘만들어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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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 지키려 은거 ‘두문동 72현’성균관 학생들 ‘과거 보이콧’설지역에 애착심…개성 상인 전통일제강점기에도 뭉쳐 빛 발해
당시 유생들, 고려 왕조도 비판조선도 초기엔 유화적 태도응시 금지는 역사적 사실 아냐
인구 급감에 개성인들 위기의식한양 선비들은 고려 유적에 흥미중앙·지역 교차 ‘로컬리티’ 구축
지금은 북한에 속하는 고려 수도 개성에 대해서는 오래된 이미지가 있다. 조선의 건국에 저항한 개성인들이 조선시대 내내 과거 응시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차별대우를 받자 상업에 몰두했고, 그 결과 매우 훌륭하고도 강력한 상업적 전통을 지니게 됐다는 것이다.
개성 사람들이 조선 정부에 저항했기에 소외당하게 됐다는 설화는 여러 가지가 전한다. 우선 두문동 72현의 이야기가 있다. 조선 건국에 반대한 이들이 개성 서쪽의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다는 이야기이다. 좀 더 극적인 버전에서는 정부가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입구에 불을 질렀음에도 나오길 거부하고 그대로 불에 타버렸다고까지 전한다.
개성인들이 과거에서 소외됐다는 것도 설화적 근거가 있다. 태조 대 개성에서 과거를 설행했으나 태학생, 즉 성균관의 학생들이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임금의 격분을 사서 과거가 금지됐다는 것이다. 이는 70여년이 지나서 성종이 개성에 행차할 때 이르러서야 해제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설화는 개성의 로컬리티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 이래 개성인들은 자신들을 ‘고려 유민’(고려의 남겨진 백성)이라고 생각했다. 이성계를 미워하며 만들었다는 조랭이떡국이나 성계육 같은 설화가 조선 왕조에 대한 민간의 적대심을 보여준다면, 지식인들 역시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다듬었다. 모든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간다’고 할 때 개성 사람들만이 ‘서울에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지역 정체성과 자부심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테다.
지역에 대한 애착심으로 똘똘 뭉친 상인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빛을 발했다. 모든 도시에서 일본 상인들의 기세에 조선 상인들이 밀려날 때, 오로지 개성에서만 일본 상인이 버텨내지 못했다. 그만큼 개성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런데 이러한 애착심과 자부심을 불러온, 개성이 차별받았다는 설화는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개성인은 과연 과거를 거부했을까
일단 조선 건국 당시 성균관 학생들이 왕조 교체에 저항했을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건국 바로 1년 전인 1391년(공양왕 3), 공양왕이 풍수적 사고에 기반해 추진한 연복사 공사와 한양 천도를 비판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유학적 관점에서 여러 비판론이 나오던 그때, 성균관은 고려 왕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과격한 비판론을 내는 선봉대였다. 이 때문에 성균관 내부에 큰 파란이 일기도 했다. 성균생원 박초 등이 초안한 상소에 연명하는 문제를 두고 생도가 찬반으로 갈려 서로 배척했고, 이를 만류하는 선생의 수업을 거부할 정도로 격렬한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고려 왕실과 공양왕을 극렬하게 비난하던 성균관 학생들이, 정작 조선이 건국하자 갑작스레 태도를 돌변해 일제히 저항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실제로 과거 설행 기록을 살펴봐도 그렇다. 1393년(태조 2) 조선 건국 후 처음 열린 식년시에서는 감시, 문과 전시, 생원시 등을 모두 정상적으로 치르고 각각 필요로 하는 만큼의 인원을 선발했다. 이들 중에는 이성계의 반대파로 몰려 귀양을 갔던 유정현의 아들 두 명도 있었다. 유정현은 두 아들의 급제를 계기로 직첩을 돌려받으며 관로에 복귀했다.
물론 과거 응시에 소극적이거나 거부하는 분위기가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고려 말 성균관 내부도 노선이 갈려 있었기에 온건파 중에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을 듯하며, 실제로 고약해처럼 이때 성균시에 합격했음에도 성균관에 나가지 않다가 태종 대에서야 관직에 나간 인물도 확인된다. 꼭 ‘옛 왕조에 대한 절의(節義)’ 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건국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정부가 과연 안착할 것인지 잠시 관망하자고 생각한 이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 정부가 과연 그러한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설령 집단적인 과거 응시 거부 사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때는 강경하게 배척하기보다는 최대한 유화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왕조 교체에 대한 긍정적 여론을 최대한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부정적인 여론 무마를 위해 개성으로 재천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여론을 의식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지지세를 늘리기 위해 부심하던 이방원이 과거 급제 동기였던 길재를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이때 길재가 출사를 거부했는데도 ‘킬 방원’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별소리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돌려보낸 것은 이 시기 정부가 처한 입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본다면, 건국 초기의 조선 정부가 과거 응시 금지 같은 강경한 조처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종 대, 태종 대 개성에 머무를 당시에도 과거는 정상적으로 치러졌다. 1399년(정종 1)과 1402년(태종 2)의 식년시와 1401년(태종 1) 태종 즉위를 기념한 증광시까지 세 차례의 과거 모두 정상적으로 치러졌다. 이 중에서도 태종 2년 식년시에서는 처음으로 무과까지 설행됐다. 많은 인파가 몰릴 수밖에 없는 과거 시험, 그것도 병장기를 들고 시험 보는 무과를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도시에서 치를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개성 사람만이 성균관 학생이 되는 것도 아닌데, 성균관 학생이 과거 응시를 거부했다고 개성인을 차별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태조 대 성균관 학생들의 과거 거부 때문에 개성인의 과거 응시를 금지했다는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로컬리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성종 대에 이르러서야 과거 응시 금지를 풀어주었다는 설화 역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설화에 따르면 1474년(성종 5) 임금의 송도 행차 때 개성의 성균관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알성시(임금의 문묘 배알을 계기로 치르는 과거)를 치르게 하며, 금고 조치가 풀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때에는 알성시를 치른 게 아니라 개성유수의 주관 아래 특별 지방 시험을 치러 유생 4명을 뽑은 것에 불과했다. 이외에도 몇 가지 우대 조치를 취해주기는 했지만, 모두 개성부에서 일회성으로 행한 것이었지, 중앙정부 차원에서 항구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었다.
성종은 기본적으로 알성시를 치르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개성 유생들이 세조가 강릉과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과거를 시행한 사례를 들어 자신들도 알성시를 보게 해달라고 거듭 상소를 올리자, 임금은 유생을 불러 이렇게 면박을 준다. “강릉과 평양은 모두 먼 지방이므로 정체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너는 경기 땅에 있으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라고(<성종실록> 성종 5년 9월27일(기묘)). 이 얘기에서도 다시금 개성인의 과거 응시는 금지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종이 엄격했던 것은 개성과 개성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비롯했다. 전날에도 성종은 “이 땅은 인재가 적어서 선비를 뽑을 수가 없다”고 했고, 신숙주나 한명회 같은 대신들도 개성은 경기에 있어 서울과 가까우므로 과거를 따로 치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개성 사람이 딱히 저항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뽑을 만한 인재가 없고 거리도 서울과 가깝다는 것이 중앙의 인식이었다.
조선 초 개성은 현격하게 인구가 축소된 상황이었다. 노사신은 “개성부가 옛 수도라고는 하지만 사대부들이 모두 서울로 옮겼으므로, 그 자제들이 남아서 배우는 자가 적다”고 했다(<성종실록> 성종 18년 3월15일(기묘)). 비슷한 시기 개성을 찾은 남효온은 건국기 유명인들의 집터가 모두 비었거나 논밭이 된 상황을 목도했다(<추강집> ‘송경록’). 한양 천도 후 대부분의 인원이 이주하며 개성은 공동화된 것이다.
성종 대 이후 비로소 소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설화와는 반대로 성종이나 대신들의 발언에서는 개성을 낮잡아 보는 느낌이 현저하다. 옛 도읍이라고는 하지만 그만한 품격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인재도 별로 없다는 등의 발언들은 설화와는 달리 도리어 이 무렵부터 중앙에서 개성을 우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위기의식은 지역민의 새로운 인식 결집으로 이어진다. 이후 “개성이 옛 수도”라는 언설은 중앙보다 개성인으로부터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나오게 된다. 개성인들은 이곳이 옛 수도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호소하며, 자신들에게 과거 응시의 기회나 혜택을 더 달라고 주장한다. 마침 이 무렵, 중앙에서는 현재 도시 규모나 문화 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는 별개로, 역사도시로서 개성에 대한 흥미가 진작됐다. 전 대 편찬 완료된 <고려사> 등을 학습한 한양의 선비들은 개성의 여러 사적지를 찾아다니며, 고려의 흥망성쇠와 조선의 건국을 추념하고, 이들의 개성 여행기는 인기리에 유포된다.
개성의 로컬리티는 바로 이러한 중앙인과 지역인의 인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되기 시작했고, 훗날 중앙의 여러 조처는 이를 다시 증폭시킨다. 개성이라는 도시는 어떻게 한 지방의 로컬리티가 구축되는지, 그리고 그렇게 제대로 구축된 로컬리티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전남광주 완도산 전복을 넣은 라면과 찌개 등 9개 메뉴가 전국 16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판매된다.
완도군은 전남광주통합시, 풀무원푸드앤컬처와 함께 휴게소용 전복 메뉴 9종을 개발했다고 14일 밝혔다.
메뉴는 전복어묵을 곁들인 우동과 라면, 전복 순두부찌개, 보양탕 등이다. 전복 특유의 쫄깃한 식감과 감칠맛을 살렸다. 가격은 기존 음식보다 1000원 안팎만 더 내면 맛볼 수 있다.
이들 메뉴는 김제·오수·함안·공주휴게소를 비롯한 전국 16곳에서 판매된다.
완도는 전국 전복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대표 산지다. 군은 최근 가격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는 전복 양식어가의 판로를 넓히기 위해 메뉴 개발을 추진했다.
지난 10~12일에는 함안휴게소 등 4곳에서 전복 메뉴를 30% 할인해 판매했다. 전복 버터구이 시식 행사도 열어 이용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완도군은 판매가 본격화하면 연간 66t 이상의 전복이 소비될 것으로 추산했다.
완도군 관계자는 “기업 등과 협력해 전복 소비 기반을 넓히고 대량 소비처를 계속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식품업계 1위인 CJ제일제당이 햇반과 만두 등 주요 가공식품 가격을 인상했다. 사조, 오뚜기, 롯데칠성음료 등도 최근 가격을 인상했거나 인상 방침을 밝혔다. 원·부재료와 포장재 등 비용 인상과 환율 상승으로 인한 원가 부담을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게 업체들 설명이다. 하반기에 서민들의 장바구니 물가 부담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17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CJ제일제당은 전날 “총 8개 카테고리, 27개 품목의 가격을 평균 8% 인상한다”고 밝혔다. 품목별로는 햇반이 12%, 생선구이 8.4%, 만두 4.6% 등으로, 최대 12% 수준이다. 인상된 가격은 대형마트에는 오는 30일부터, 편의점에는 다음 달 1일부터 적용된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그동안 가격 인상 요인을 최대한 감내해왔으나, 주요 원·부재료비 상승이 지속되면서 원가 부담이 커져 일부 제품 가격을 조정하게 됐다”며 “소비자 부담을 고려해 인상 품목과 폭은 최소화했다”고 밝혔다.
사조그룹은 다음 달 3일부터 주요 가공식품 출고가를 인상한다. 참치 캔이 10%, 꽁치·고등어 등 수산물 캔이 20% 오른다. 고추장, 된장, 쌈장 등 장류와 참기름, 들기름 등 식용 유지 제품도 각각 12% 인상한다. 앞서 사조는 지난 2일부터 어묵과 맛살 가격도 6~7% 인상했다.
오뚜기는 전날부터 후추류 17%, 당면류 10%, 카레·케첩류 각 6.1% 등 29개 품목 출고가를 인상했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달 26일부터 12개 브랜드, 44개 품목 출고가를 평균 5.3% 인상했다. 하림은 이달 1일부터 편의점용 핫바와 닭가슴살 일부 제품 가격을 100~300원 올렸다.
그간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식품업계에 가격 인상 자제를 요청해왔다. 이에 일부 식품업체는 지난 3월 라면과 식용유, 과자·아이스크림 등 가격을 소폭 인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환율에 따른 수입 원재료비 상승과 포장재·물류비 부담이 누적돼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게 식품업계 입장이다. 이에 식품업체들은 6·3 지방선거가 끝나자 하나둘 가격 인상에 나서고 있다.
특히 업계 1위인 CJ제일제당이 제품 가격을 인상하면서, 원가 부담에도 시장 상황을 살피던 다른 업체들이 줄줄이 인상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된다. 햇반의 경우 국내 즉석밥 시장 점유율이 70%가 넘는다.
정부의 물가 관리와 서민들의 재정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특히 전체 소비 지출에서 식료품비 지출 비중이 높은 저소득층이 식품 가격 인상으로 인한 체감 부담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2%, 생활물가 상승률은 3.4%였다. 정부는 최근 올해 하반기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2.1%에서 2.6%로 높였다.
당시 유생들, 고려 왕조도 비판조선도 초기엔 유화적 태도응시 금지는 역사적 사실 아냐
인구 급감에 개성인들 위기의식한양 선비들은 고려 유적에 흥미중앙·지역 교차 ‘로컬리티’ 구축
지금은 북한에 속하는 고려 수도 개성에 대해서는 오래된 이미지가 있다. 조선의 건국에 저항한 개성인들이 조선시대 내내 과거 응시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차별대우를 받자 상업에 몰두했고, 그 결과 매우 훌륭하고도 강력한 상업적 전통을 지니게 됐다는 것이다.
개성 사람들이 조선 정부에 저항했기에 소외당하게 됐다는 설화는 여러 가지가 전한다. 우선 두문동 72현의 이야기가 있다. 조선 건국에 반대한 이들이 개성 서쪽의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다는 이야기이다. 좀 더 극적인 버전에서는 정부가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입구에 불을 질렀음에도 나오길 거부하고 그대로 불에 타버렸다고까지 전한다.
개성인들이 과거에서 소외됐다는 것도 설화적 근거가 있다. 태조 대 개성에서 과거를 설행했으나 태학생, 즉 성균관의 학생들이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임금의 격분을 사서 과거가 금지됐다는 것이다. 이는 70여년이 지나서 성종이 개성에 행차할 때 이르러서야 해제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설화는 개성의 로컬리티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 이래 개성인들은 자신들을 ‘고려 유민’(고려의 남겨진 백성)이라고 생각했다. 이성계를 미워하며 만들었다는 조랭이떡국이나 성계육 같은 설화가 조선 왕조에 대한 민간의 적대심을 보여준다면, 지식인들 역시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다듬었다. 모든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간다’고 할 때 개성 사람들만이 ‘서울에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지역 정체성과 자부심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테다.
지역에 대한 애착심으로 똘똘 뭉친 상인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빛을 발했다. 모든 도시에서 일본 상인들의 기세에 조선 상인들이 밀려날 때, 오로지 개성에서만 일본 상인이 버텨내지 못했다. 그만큼 개성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런데 이러한 애착심과 자부심을 불러온, 개성이 차별받았다는 설화는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개성인은 과연 과거를 거부했을까
일단 조선 건국 당시 성균관 학생들이 왕조 교체에 저항했을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건국 바로 1년 전인 1391년(공양왕 3), 공양왕이 풍수적 사고에 기반해 추진한 연복사 공사와 한양 천도를 비판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유학적 관점에서 여러 비판론이 나오던 그때, 성균관은 고려 왕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과격한 비판론을 내는 선봉대였다. 이 때문에 성균관 내부에 큰 파란이 일기도 했다. 성균생원 박초 등이 초안한 상소에 연명하는 문제를 두고 생도가 찬반으로 갈려 서로 배척했고, 이를 만류하는 선생의 수업을 거부할 정도로 격렬한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고려 왕실과 공양왕을 극렬하게 비난하던 성균관 학생들이, 정작 조선이 건국하자 갑작스레 태도를 돌변해 일제히 저항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실제로 과거 설행 기록을 살펴봐도 그렇다. 1393년(태조 2) 조선 건국 후 처음 열린 식년시에서는 감시, 문과 전시, 생원시 등을 모두 정상적으로 치르고 각각 필요로 하는 만큼의 인원을 선발했다. 이들 중에는 이성계의 반대파로 몰려 귀양을 갔던 유정현의 아들 두 명도 있었다. 유정현은 두 아들의 급제를 계기로 직첩을 돌려받으며 관로에 복귀했다.
물론 과거 응시에 소극적이거나 거부하는 분위기가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고려 말 성균관 내부도 노선이 갈려 있었기에 온건파 중에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을 듯하며, 실제로 고약해처럼 이때 성균시에 합격했음에도 성균관에 나가지 않다가 태종 대에서야 관직에 나간 인물도 확인된다. 꼭 ‘옛 왕조에 대한 절의(節義)’ 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건국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정부가 과연 안착할 것인지 잠시 관망하자고 생각한 이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 정부가 과연 그러한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설령 집단적인 과거 응시 거부 사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때는 강경하게 배척하기보다는 최대한 유화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왕조 교체에 대한 긍정적 여론을 최대한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부정적인 여론 무마를 위해 개성으로 재천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여론을 의식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지지세를 늘리기 위해 부심하던 이방원이 과거 급제 동기였던 길재를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이때 길재가 출사를 거부했는데도 ‘킬 방원’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별소리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돌려보낸 것은 이 시기 정부가 처한 입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본다면, 건국 초기의 조선 정부가 과거 응시 금지 같은 강경한 조처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종 대, 태종 대 개성에 머무를 당시에도 과거는 정상적으로 치러졌다. 1399년(정종 1)과 1402년(태종 2)의 식년시와 1401년(태종 1) 태종 즉위를 기념한 증광시까지 세 차례의 과거 모두 정상적으로 치러졌다. 이 중에서도 태종 2년 식년시에서는 처음으로 무과까지 설행됐다. 많은 인파가 몰릴 수밖에 없는 과거 시험, 그것도 병장기를 들고 시험 보는 무과를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도시에서 치를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개성 사람만이 성균관 학생이 되는 것도 아닌데, 성균관 학생이 과거 응시를 거부했다고 개성인을 차별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태조 대 성균관 학생들의 과거 거부 때문에 개성인의 과거 응시를 금지했다는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로컬리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성종 대에 이르러서야 과거 응시 금지를 풀어주었다는 설화 역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설화에 따르면 1474년(성종 5) 임금의 송도 행차 때 개성의 성균관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알성시(임금의 문묘 배알을 계기로 치르는 과거)를 치르게 하며, 금고 조치가 풀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때에는 알성시를 치른 게 아니라 개성유수의 주관 아래 특별 지방 시험을 치러 유생 4명을 뽑은 것에 불과했다. 이외에도 몇 가지 우대 조치를 취해주기는 했지만, 모두 개성부에서 일회성으로 행한 것이었지, 중앙정부 차원에서 항구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었다.
성종은 기본적으로 알성시를 치르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개성 유생들이 세조가 강릉과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과거를 시행한 사례를 들어 자신들도 알성시를 보게 해달라고 거듭 상소를 올리자, 임금은 유생을 불러 이렇게 면박을 준다. “강릉과 평양은 모두 먼 지방이므로 정체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너는 경기 땅에 있으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라고(<성종실록> 성종 5년 9월27일(기묘)). 이 얘기에서도 다시금 개성인의 과거 응시는 금지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종이 엄격했던 것은 개성과 개성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비롯했다. 전날에도 성종은 “이 땅은 인재가 적어서 선비를 뽑을 수가 없다”고 했고, 신숙주나 한명회 같은 대신들도 개성은 경기에 있어 서울과 가까우므로 과거를 따로 치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개성 사람이 딱히 저항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뽑을 만한 인재가 없고 거리도 서울과 가깝다는 것이 중앙의 인식이었다.
조선 초 개성은 현격하게 인구가 축소된 상황이었다. 노사신은 “개성부가 옛 수도라고는 하지만 사대부들이 모두 서울로 옮겼으므로, 그 자제들이 남아서 배우는 자가 적다”고 했다(<성종실록> 성종 18년 3월15일(기묘)). 비슷한 시기 개성을 찾은 남효온은 건국기 유명인들의 집터가 모두 비었거나 논밭이 된 상황을 목도했다(<추강집> ‘송경록’). 한양 천도 후 대부분의 인원이 이주하며 개성은 공동화된 것이다.
성종 대 이후 비로소 소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설화와는 반대로 성종이나 대신들의 발언에서는 개성을 낮잡아 보는 느낌이 현저하다. 옛 도읍이라고는 하지만 그만한 품격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인재도 별로 없다는 등의 발언들은 설화와는 달리 도리어 이 무렵부터 중앙에서 개성을 우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위기의식은 지역민의 새로운 인식 결집으로 이어진다. 이후 “개성이 옛 수도”라는 언설은 중앙보다 개성인으로부터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나오게 된다. 개성인들은 이곳이 옛 수도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호소하며, 자신들에게 과거 응시의 기회나 혜택을 더 달라고 주장한다. 마침 이 무렵, 중앙에서는 현재 도시 규모나 문화 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는 별개로, 역사도시로서 개성에 대한 흥미가 진작됐다. 전 대 편찬 완료된 <고려사> 등을 학습한 한양의 선비들은 개성의 여러 사적지를 찾아다니며, 고려의 흥망성쇠와 조선의 건국을 추념하고, 이들의 개성 여행기는 인기리에 유포된다.
개성의 로컬리티는 바로 이러한 중앙인과 지역인의 인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되기 시작했고, 훗날 중앙의 여러 조처는 이를 다시 증폭시킨다. 개성이라는 도시는 어떻게 한 지방의 로컬리티가 구축되는지, 그리고 그렇게 제대로 구축된 로컬리티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전남광주 완도산 전복을 넣은 라면과 찌개 등 9개 메뉴가 전국 16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판매된다.
완도군은 전남광주통합시, 풀무원푸드앤컬처와 함께 휴게소용 전복 메뉴 9종을 개발했다고 14일 밝혔다.
메뉴는 전복어묵을 곁들인 우동과 라면, 전복 순두부찌개, 보양탕 등이다. 전복 특유의 쫄깃한 식감과 감칠맛을 살렸다. 가격은 기존 음식보다 1000원 안팎만 더 내면 맛볼 수 있다.
이들 메뉴는 김제·오수·함안·공주휴게소를 비롯한 전국 16곳에서 판매된다.
완도는 전국 전복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대표 산지다. 군은 최근 가격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는 전복 양식어가의 판로를 넓히기 위해 메뉴 개발을 추진했다.
지난 10~12일에는 함안휴게소 등 4곳에서 전복 메뉴를 30% 할인해 판매했다. 전복 버터구이 시식 행사도 열어 이용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완도군은 판매가 본격화하면 연간 66t 이상의 전복이 소비될 것으로 추산했다.
완도군 관계자는 “기업 등과 협력해 전복 소비 기반을 넓히고 대량 소비처를 계속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식품업계 1위인 CJ제일제당이 햇반과 만두 등 주요 가공식품 가격을 인상했다. 사조, 오뚜기, 롯데칠성음료 등도 최근 가격을 인상했거나 인상 방침을 밝혔다. 원·부재료와 포장재 등 비용 인상과 환율 상승으로 인한 원가 부담을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게 업체들 설명이다. 하반기에 서민들의 장바구니 물가 부담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17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CJ제일제당은 전날 “총 8개 카테고리, 27개 품목의 가격을 평균 8% 인상한다”고 밝혔다. 품목별로는 햇반이 12%, 생선구이 8.4%, 만두 4.6% 등으로, 최대 12% 수준이다. 인상된 가격은 대형마트에는 오는 30일부터, 편의점에는 다음 달 1일부터 적용된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그동안 가격 인상 요인을 최대한 감내해왔으나, 주요 원·부재료비 상승이 지속되면서 원가 부담이 커져 일부 제품 가격을 조정하게 됐다”며 “소비자 부담을 고려해 인상 품목과 폭은 최소화했다”고 밝혔다.
사조그룹은 다음 달 3일부터 주요 가공식품 출고가를 인상한다. 참치 캔이 10%, 꽁치·고등어 등 수산물 캔이 20% 오른다. 고추장, 된장, 쌈장 등 장류와 참기름, 들기름 등 식용 유지 제품도 각각 12% 인상한다. 앞서 사조는 지난 2일부터 어묵과 맛살 가격도 6~7% 인상했다.
오뚜기는 전날부터 후추류 17%, 당면류 10%, 카레·케첩류 각 6.1% 등 29개 품목 출고가를 인상했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달 26일부터 12개 브랜드, 44개 품목 출고가를 평균 5.3% 인상했다. 하림은 이달 1일부터 편의점용 핫바와 닭가슴살 일부 제품 가격을 100~300원 올렸다.
그간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식품업계에 가격 인상 자제를 요청해왔다. 이에 일부 식품업체는 지난 3월 라면과 식용유, 과자·아이스크림 등 가격을 소폭 인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환율에 따른 수입 원재료비 상승과 포장재·물류비 부담이 누적돼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게 식품업계 입장이다. 이에 식품업체들은 6·3 지방선거가 끝나자 하나둘 가격 인상에 나서고 있다.
특히 업계 1위인 CJ제일제당이 제품 가격을 인상하면서, 원가 부담에도 시장 상황을 살피던 다른 업체들이 줄줄이 인상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된다. 햇반의 경우 국내 즉석밥 시장 점유율이 70%가 넘는다.
정부의 물가 관리와 서민들의 재정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특히 전체 소비 지출에서 식료품비 지출 비중이 높은 저소득층이 식품 가격 인상으로 인한 체감 부담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2%, 생활물가 상승률은 3.4%였다. 정부는 최근 올해 하반기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2.1%에서 2.6%로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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