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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폰테크당일 [정지아의 선물]오징어젓과 육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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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이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6-07-18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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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테크당일 지난겨울, 김장을 했다. 무려 육십 포기나. 지난 몇년 친한 언니의 김장을 돕고 여러 통 얻어먹었지만 내가 주도해서 김치를 담근 건 처음이었다. 언니의 레시피 덕에 김치가 제법 맛있었다. 김장을 해본 적 없는 서울 출신 제자가 이렇게 맛있는 김치는 첨이라며 김치 한 사발에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언니의 김장 레시피가 사실 색다를 건 없다. 생새우 대신 민물새우인 토하를 갈아 넣는다는 정도? 아, 육수에 말린 메주콩과 고구마를 넣는 것? 그 외 다른 점이라면 추젓 대신 육젓을 썼다는 점이었다. 제자는 추젓과 육젓의 차이도 알지 못했지만 보통 김장할 때는 육젓을 쓰지 않는다.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내가 비싼 육젓을 추젓 대신 듬뿍 넣을 수 있었던 건 한 제자 덕분이다.
제자 어머니 남친, 아니 남사친이 젓갈 도매업을 하신대. 엄청 좋은 광천 토굴 육젓을 몇통이나 보내주셨어.
제자는 몇해 전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얼마 뒤 어머니가 첫사랑이었다는 초등학교 동창이 연락을 해왔다. 첫사랑이란 그렇게 오래도록 아련한 모양이다.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친구라고 딱 잘라 선을 그었단다. 역시 혼자가 됐다는 그 동창에게는 첫사랑이 현재 진행 중인 건지, 그저 아련함으로 남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자신이 담가 판매하는 온갖 종류의 젓갈로 첫사랑에게 선물 공세를 퍼붓고 있다. 그 선물이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내 설명을 들은 제자가 배를 잡고 웃었다.
쌤 밥상에는 김치 하나에도 서사가 있구나! 천상 소설가야.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둔 덕이다. 빨치산이었던 내 부모는 모든 복을 명(命)으로 받아 천수를 누렸고 누리는 중인데 암만해도 나는 모든 복을 사람으로 받은 것 같다. 어머니에게 온 육젓을 보낸 제자는 내가 특별히 해준 것도 없다. 대학에 입학해 처음 쓴 소설이 너무 좋았고, 잘 쓴다 칭찬했을 뿐이다. 선생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 작은 관심과 칭찬을 거름 삼아 좋은 사람으로 잘살고 있다. 노상 내 덕이라 하지만 그 정도의 선의를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것도, 잊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제자 자신의 능력이고 성품이다.
두어 해 전, 제자 몇과 동해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여행이라기보다 내 강연이 있었는데 워낙 멀어 하루 자야 했고, 구례서 운전해 가기는 너무 먼 길이라 육젓 보낸 제자가 대신 운전을 해준 것이다. 어느 가게에서 삼숙이탕을 먹었는데 탕도 맛있었지만 밑반찬으로 나온 오징어젓갈이 너무 맛있었다. 원래 잘 먹지도 않던 젓갈을 주인을 졸라 조금 샀다. 제자는 그 작은 일을 지금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 전 놀러 온 제자가 오징어젓갈 한 통을 내밀었다. 제 식구와 어느 식당에 갔는데 오징어젓갈이 괜찮길래 사 왔다나.
나중에 동해 가면 그 집 거 사 올게요. 이것도 혹 입맛에 맞으실까 하고.
이미 제자는 동해 식당에 전화를 걸어 택배를 부탁했었단다. 장사 잘되는 집답게 택배는 하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했다가 비슷한 맛을 발견하고 사 온 것이다. 이런 선물은 입맛이고 뭐고 없다. 그냥 맛있어야 하는 거다. 실제로 맛있기도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한 통을 다 먹어 치웠는데 마음이라는 최고의 엠에스지 덕분이었을 게다. 이런 아이가 내 제자라니, 다 내 복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김장김치에는 온갖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고창 농부가 보내준 고춧가루, 제자의 육젓,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떡집 언니의 모델인 엄마 친구 딸이 담근 멸치액젓, 역시 소설 속 ‘짝은 상욱이’의 모델인 곡성 농부가 농사지은 찹쌀, 친한 선배의 오빠가 직접 기른 양파, 선배의 사촌 언니가 농사지어 절여준 배추, 친한 구례 농부가 직접 잡은 토하에 이르기까지, 여러 친구의 정성스러운 마음의 결과물이 우리 집 김장김치다.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 음, 내가 직접 키운 무와 생강도 한몫했다.
서울 살 때 나는 밥상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마지못해 한 끼 대충 때웠다. 밥이 자동차 굴러가게 하는 휘발유나 되는 양. 시골 와 살아보니 알겠다. 정성어린 마음으로 차린 밥이 몸과 맘을 살찌운다. 사람은 그런 밥을 먹어야 몸도 맘도 건강하다. 밥을 무시하는 사람이 어찌 제 몸과 삶을 존중할 수 있으랴. 내 밥상은 오늘도 좋은 사람들 덕분에 알차고 맛나다.
냉방 기술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제철의 맛으로 여름을 났다. 여름 과채로 수분을 보충하고 발효 음식으로 기운을 북돋웠다. 선조들의 여름 밥상에 물김치가 빠지지 않았던 이유다. 사찰에서는 수박도 물김치로 담가 계절의 갈증을 달랬다. 달콤한 수박이 개운한 물김치에 녹아들며 식탁 위 감초 역할을 했다.
수박은 생각보다 오래된 우리 여름 식재료다. 고려 말 원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는 수박과 참외가 대표적인 여름 과실로 등장하고, 부녀자들의 생활 백과였던 <규합총서>에도 여름철 과채를 이용한 저장 음식과 물김치 조리법이 여럿 기록돼 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여름 과일과 채소를 오래 즐기기 위해 발효의 지혜를 빌렸다. 오이와 참외는 물김치가 되었고, 먹고 남은 수박 껍질은 장아찌와 나물로 다시 태어났다. 버리는 부분이 거의 없는 음식 문화였다.
이번 절로미식회는 김천 송학사 주지 주호 스님이 소개하는 ‘수박여름물김치’다. 붉은 수박과 방울토마토가 떠 있는 모습은 여름 디저트 화채처럼 보인다. 하지만 맛을 보면 달달함보다 청량함을 머금은 김치다.
비밀은 풀국에 있다. 묽게 쑨 밀가루죽이 국물 속 미생물의 먹이가 되면서 천천히 발효가 시작된다. 시간이 지나면 수박즙의 단맛은 한층 차분해지고, 홍고추의 향과 생강의 알싸함이 어우러져 훨씬 개운한 맛으로 변한다.
주호 스님은 “화채 같지만 풀국이 들어가기 때문에 김치처럼 발효가 된다”며 “발효가 진행되면 단맛보다 개운한 맛이 살아난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붉은 수박 과육을 처음부터 넣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게 썬 수박의 빨간 과육은 따로 남겨두었다가 먹기 직전에 올린다. 과육까지 함께 발효시키면 쉽게 무르고 색이 흐려질 수 있어서다. 마지막에 올린 빨간 수박 속살은 물김치에 보석을 띄운 듯 화룡점정이 된다.
절집에서는 음식의 모양 역시 수행의 일부로 여긴다. 맛뿐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재료 크기를 맞추는 일도 중요하다. 수박의 흰 부분, 오이, 배추, 토마토를 비슷한 크기로 썰어야 씹는 식감이 조화를 이루고 국물 맛도 균일하게 배어난다. 주호 스님은 “재료의 크기를 같게 써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말했다.
수박물김치의 또 다른 장점은 속이 편안하다는 점이다. 찬 수박을 먹으면 배가 아프거나 설사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발효 과정을 거친 수박물김치는 부담이 훨씬 적다. 주호 스님은 “생수박을 먹으면 배탈이 나는 사람도 김치로 발효시켜 먹으면 여름을 입안 가득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반나절 정도 냉장고에서 숙성시키면 붉은 수박즙과 고춧물이 서서히 어우러진다. 국물은 투명한 분홍빛을 띠고, 그 위에 마지막으로 올린 수박 과육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박 한 통을 다 먹지 못해 고민되는 계절이다. 화채를 만들고도 남았다면 이번에는 물김치에 녹여보는 건 어떨까. 제철의 맛으로 무더위를 달랜 사찰의 지혜가 물김치 한 그릇에서 시원하게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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